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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때에
남풍이 불어오네

글. 문태준(시인)

일이 시작하는 때를 나는 남풍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때라고 부르고 싶다. 일의 시작은 초봄과 같다. 씨앗을 뿌리는 때인 것이다.
순이 움트는 때인 것이다. 프랑스의 여성 시인 루이사 폴렝도 이 남풍의 불어옴을 찬탄했다.
“오 남풍이여, 어여 와, 하얀 눈을 마셔줘요. / 우리는 얼음과 바람으로 배가 불러요. / 다감한 민들레가 흙에서 뽑아내요. / 황금빛으로 아롱이는 아주 조그만 햇살 하나를.” 이라고 썼다.
시작하는 무렵은 민들레가 얼어 있던 땅에서 작은 햇살 하나를 뽑아내는 것과 같은 때이다.
희망의 단초를 만들기 시작하는 때인 것이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아버지가 새해를 맞아 농사를 준비하시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아버지께서는 작년에 수확한 작물들을 그 상태에 따라 선별하시고, 농사에 쓸 씨앗들을 살피셨다.
아버지의 농사는 봄이 오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파종할 종자를 미리 마련하셨다. 그 일이 아버지에게는 희망의 첫머리였던 셈이었다. 터를 잘 닦지 않고 건물을 세울 수 없듯이 어떤 일이든 그 시작에는 기초가 되어야 할 것들이 예비되어야 한다. 마치 시인에게도 한 편의 시를 새롭게 짓기 위해선 신선한 생각과 적절한 언어들을 사전에 모아야 하듯이. 시작을 위해서는 튼튼한 작심이 함께 필요하다. 잘 될 거라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자신의 내면에 가득 불어넣어야 한다. 모든 것은 마음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마치 달이 구름으로부터 나오듯이 부정적인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미래의 좋은 일은 현재의 밝은 내면의 뿌리로부터 잉태되는 까닭이다.
스스로를 굳게 믿지 않으면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가끔 나는 자전거 타는 방법을 배웠던 경험을 떠올린다. 혼자 자전거 안장에 앉았을 때의 불안감을 극복해야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앞쪽에 활짝 펼쳐진 길로 진행할 수 있다. 이처럼 자신을 산처럼 신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힘은 비롯된다.
나는 ‘꽃’이라는 시를 근래에 쓴 적이 있다.
“당신은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 조심스레 내려가 / 가만히 앉으세요. / 그리고 숨을 쉬세요. / 부드러운 둘레와 / 밝은 둘레와 / 입체적 기쁨 속에서” 라고 써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내면이 꽃의 내부 공간과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표현한 적이 있다.
어떤 일을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속은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내면을 부드러움과 밝음과 기쁨이 감싸게 해야 하는 것이다. 제주에 이사를 와 살면서 나는 매일 오후에 잠깐의 시간을 내서 항구로 간다. 대개는 오후 2시 무렵이다. 이때는 어선들이 출항을 하는 시간이다. 어선들은 뱃고동을 울리면서 푸른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어선들에 탄 선원들은 바다에 펼칠 그물을 확인하고 뱃머리는 파도를 넘으면서 의욕적으로 먼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만선의 꿈을 갖고서 오늘의 새로운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힘찬 출항을 볼 때마다 나는 어떤 일을 막 시작한 나의 상태를 돌아본다. 그리곤 항구의 풍경으로부터 새로운 기운을 얻는다.일의 중도에는 때때로 어려운 일이 닥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를 우리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야 할 일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이렇게 썼다.
“불길이 무섭게 타올라도 끄는 방법이 있고 물결이 하늘을 다 덮어도 막는 방법이 있으니 화는 위험할 때 있는 것이 아니고 편안할 때 있으며, 복은 경사 났을 때 있는 것이 아니라 근심할 때 있다.”
일이 순탄하게 잘 될 때에 화가 생겨날 수 있고, 근심이 많은 어려운 때를 잘 견디면 복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물론 실수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즉시 바로잡으면 된다. 빠른 처방으로 환자가 병으로부터 벗어나듯이 실수로부터 빠져나오면 된다. 길을 잘못 들면 곧바로 그 길을 나와 다른 길로 나아가면 되는 것처럼.
새해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새로운 시간을 살고 있다. 마음을 먹었으면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어선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의 한복판을 향해 세찬 기운으로 나아가듯이 말이다.

문태준_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등이 있다. 노작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애지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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