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은 저녁 ‘영주 선비촌’에서 달빛만 고요한 골목을 걸어 하룻밤 묵을 방을 찾아가는데 마치 영화 속을 걷는 듯 묘한 설렘이 있었습니다.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보냈던 그 밤은 새소리, 숲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가득해서 자연 속에 누워있는 듯 아주 포근했답니다. 그 날 이후 여행을 계획하게 되면, 한옥스테이가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곤 합니다.
글, 사진. 여행지기(네이버 여행 블로거, @traveler_7000)
여행지의 하룻밤은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빌려서 특별한 체험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이 아닌 곳에서 설렘과 편안함을 동시에 갖고 싶어서, 숙소를 고르는데 많은 공을 들여 꼼꼼하게 찾습니다. 하룻밤이지만 그 밤이 그 여행의 추억을 좌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한옥은 온갖 감각으로 여행지를 생생하게 떠올려 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가벼운 장지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의 온갖 소리들, 따스하게 찾아오는 햇살, 부드럽게 스며드는 맑은 공기, 온 몸을 노곤하게 만들어 주는 뜨끈한 아랫목, 달밤이면 방안 가득 신비로움을 전해주는 달빛까지 한옥의 방은 자연을 온 감각으로 느끼게 해 줍니다. 저는 그 느낌이 좋아서 여행지마다 추억을 새겨둔 한옥들이 많은데, 그중 가장 마음에 남은 세 곳을 떠올려 봅니다.
한옥에 녹아든 역사와 이야기
경상북도 안동은 참 좋아하는 여행지라서 계절마다 찾는 곳입니다. 안동에서도 가장 안동스런 곳이 어디일까 찾다가 알게 된 옥연정사 (玉淵精舍), 맑고 푸른 물빛이 얼마나 좋았으면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안동의 하회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부용대에 자리한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징비록(懲毖錄)>을 서술하신 곳이랍니다. 임진왜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뜻으로 <징비록>을 서술하셨다고 합니다. 부끄러움과 반성의 기록을 쓰시면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에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460여 년이 넘은 소나무가 지켜보는 옥연정사에서 내려다보는 하회마을 풍경은 정겨웠고, 종손께서 설명해주시는 옥연정사의 이야기가 공간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처음 읽어 보는 <징비록> 몇 구절을 마음에 새기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방안 깊숙이 스며드는 햇살에 눈을 뜨고 방문을 열었을 때, 쨍하게 맑은 공기가 마음까지 스며들었던 그 산뜻함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선생의 15대 종부께서 차려내신 아침상은 미각으로 오래오래 남아 안동을 추억하게 해 줍니다. 공간을 경험하는 것이 가장 생생하게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구나 하는 감동을 얻었던 곳입니다.
청송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덕천 마을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고택이 7채가 있어서 한옥 체험이 가능한데 99칸의 송소고택이 대표적 입니다. 덕천 마을 내에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역사가 오래된 1914년 지어진 송정고택을 찾았는데, 2011년부터 한옥스테이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많은 고택에서 하룻밤을 보냈었지만,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만큼 좋은 곳이었습니다.
광복 이후 초대 총리를 지내신 철기 이범석 장군께서 머무셨다는 사랑방 은 역사적 의미와 한옥의 아름다움이 정말 최고인 곳이었고, 제가 묵었던 곳은 안채의 중심인 안방입니다. 아늑한 안채의 편안함과 포근하면서도 이불, 정갈하게 도배된 방의 내부는 이 고택을 얼마나 큰 애정으로 관리하고 있는지 그대로 알 수 있었고, 너무 아름다워 오랜 시간을 잘 지켜오시는 집주인께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내어주신 따스한 차 한잔은 여행자의 긴장감을 풀어 주셨고, 다음 날 송정고택을 떠날 때는 보이지 않으실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셔서 뭉클한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마치 고향을 찾았다가 정을 듬뿍 받고 돌아가는 감동이었습니다. 글을 쓰다보니 그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하룻밤이지만 추억으로는 아주 길게 남아있구나 싶어집니다. 마을길을 산책하던 그 저녁도 떠오르고, 붉게 물들어 가던 저녁노을을 보면서 아름다움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깊은 감동을 주었던 마을 풍경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동은 역시 ‘평사리’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봄의 생명력이 연두빛 물결로 피어나던 평사리의 봄,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오던 황금들판의 풍성한 가을은 하동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입니다. ‘평사리’ 명칭에서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쉽게 생각하실 수 있을 겁니다. 평사리는 바로 토지의 무대가 된 곳이니까요. 그 곳에 박경리 문학관과 토지 드라마의 무대가 된 최참판댁이 있고, 문학관 위쪽에 자리한 올모스트홈스테이는 조금 특별했습니다.
한옥이지만 사용하기 편리하게 내부를 개조해서 한옥이 주는 불편함은 없애고, 한옥의 느낌은 그대로 가진 독특한 공간입니다. 좀 더 편안하게 한옥 체험을 하고 싶을 때 찾으면 좋은 곳입니다. 공간도 넉넉하고 부엌과 식탁이 있어 간편하게 식사를 준비할 수 있어 더 좋았습니다.
체크인할 때 신청을 하면 하동의 특산물로 차려진 건강하고 맛있는 조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바람 살랑이는 툇마루에 앉아 아침상을 받으면 이런 것이 진짜 힐링이구나 싶어집니다. 아침을 먹고 조금 걸어 내려와 최참판댁 사랑채에 올라서서 평사리를 바라보는 그 순간은 여행이 주는 감동의 정점에 오를 때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