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인간 이상의 세계

text·painting. 신혜우(작가이자 화가)

잣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식물로 소나무 솔방울과 닮은 잣송이가 맺힌다. 잣송이는 솔방울보다 훨씬 크고 무겁다. 그 안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잣이 딱딱한 껍질에 쌓여 가득 들어있다. 잣이 아몬드나 호두처럼 한 알씩 열릴 것이라 상상했던 사람들은 잣이 잣나무 솔방울에 가득 들어있는 씨앗임을 알게 되면 깜짝 놀란다.

잣송이는 소나무 솔방울과 달리 나뭇가지에 많이 달리지 않는다. 나무 꼭대기나, 가장자리 가지 끝에 몇 개씩 모여 달린다. 그래서 채집이 쉽지 않다. 실험실에 잣송이 표본이 없어 가평에 식물채집을 간 적이 있다. 잣송이가 모두 높은 곳에 달려있어 고민하고 있을 때 어느 잣나무 위에서 잣송이를 따고 있는 청설모를 보게 되었다. 청설모는 자기보다 큰 잣송이를 열심히 양손으로 돌려 따고 있었다. 가지에 딱 붙은 잣송이를 따는 건 사람도 쉽지 않은데 청설모는 똑똑하게 잣송이를 한 방향으로 야무지게 돌려 잣송이를 가지에서 분리해 내고 있었다. 결국 잣송이는 청설모의 손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청설모는 자신보다 무거운 잣송이를 놓치고 말았고 잣송이는 땅에 떨어졌다. 나와 동료들은 망연자실한 듯 쳐다보는 청설모 때문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미안해하며 잣송이를 가방에 넣었다.

청설모가 대신 채집해 준 잣송이 이야기를 하면 다들 웃는다. 안타깝지만 귀여워 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자연 속을 누비면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대단한 발견도 있지만 소소하면서 행복한 순간도 많다. 그리고 그건 특별하지만 자연스러운 편안함과 행복감을 준다.

미국의 생태학자이자 철학자인 데이비드 에이브람(David Abram)은 “우리는 인간이 아닌 종들과 접촉하며 공생할 때에만 인간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건 우리 외에 수많은 종이 함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 속에서 우리는 다른 종을 만날 수 있고, 이 잣송이 일화처럼 교감하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자연이 더 생기있고 풍성했던, 또 인간이 자연에 친숙했던 옛날에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만든 것으로 주변을 채워 나가면서 자연으로부터 고립되고 있다. 우리는 자연을 차단하고, 우리가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구조물과 물건들에 둘러싸여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먹고 있는 잣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꽃이 피고 씨앗을 맺어 나에게 온 것인지 모른다. 잣나무를 찾으며 만나게 되는 수많은 다른 생물과 그들의 이야기를 놓치게 된다

우리가 겪고 있고, 또 앞으로 겪을 환경 문제들은 우리가 진정한 ‘인간’의 자리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에이브람은 자연에 대해 “인간 이상의 세계”라고 했다. 이 당연한 말이 새삼 깨달음을 주는 건 인간이 다른 종들에 대해 잊은 지 오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잣나무가 소나무과에 속하며 솔방울처럼 잣송이를 맺는다는 식물학적 지식을 책에서 읽기보다 청설모와 교감하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진정한 우리의 자리를 자연스럽게 찾길 바란다.

신혜우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 식물을 연구하는 화가.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하고 식물분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스미소니언 환경연구센터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일했다. 식물분류학과 생물 일러스트레이션 분야를 융합한 국내외 전시, 식물상담소, 강연, 어린이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를 쓰고 그렸다. 산문집 <이웃집 식물상담소>에서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찾아와 식물을 통해 감동과 인생의 지혜를 얻어 간 이야기를 다정하게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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