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 다녀올게

섬과 섬 사이 노을을 드리운

진도

text. 김주희 photo. 이수연

노을은 오늘의 엔딩 크레디트인 동시에 내일을 위한 가장 찬란한 예고편이다. 섬과 섬 사이로 노을이 내려앉는 진도를 찾았다. 태초의 신비로운 자연, 소박한 삶의 정서, 임진왜란 승리의 역사와 기개, 한여름 절정의 풍경까지. 섬은 이 모든 것을 한 몸에 웅숭깊이 품었다. 진도가 또 다른 이름 보배섬으로 설명되는 이유다.

진도대교를 가로지르는 역사와 정취

‘섬’ 여행이 주는 특유의 여운이 있다. 작고 외딴 땅에 발을 디디는 것만으로 신비로우면서 아늑한 정서를 선사한다. 진도는 땅끝마을 해남에서도 다리를 건너서 더 깊이 들어가야만 닿을 수 있는 섬이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 큰 섬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성근만큼 청정한 자연이 옹골차게 들어차 있다.

진도 여행은 뭍과 연결된 쌍둥이 진도대교에서 시작된다. 명량해협의 좁은 폭 위에 건설된 이 다리를 둘러싼 이야기가 제법 풍성하고 흥미롭다. 명량해협의 순우리말인 울돌목은 ‘소리 내어 우는 바다의 길목’을 뜻한다. 임진왜란 당시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전승지로 의미가 큰 곳이다. 호리병처럼 좁고 얕아진 해로에서 휘돌아가는 물살을 활용해 해전 승리를 이끈 역사를 곱씹으며 바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

물살이 마치 회오리처럼 제 몸을 비틀고 꼬면서 장관을 연출하는데, 빠른 유속을 타고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진도대교 아래에 자리한 울돌목스카이워크에 오르면 회오리 물살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투명한 유리에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짜릿한 스릴도 만끽한다. 대교 아래 카페에서는 휴식을 즐기며 회오리 물살을 감상하는 것도 색다른 재미일 터. 진도대교를 가로지르면 진도타워에 닿는다. 전망대에 오르자 진도대교와 울돌목의 탁 트인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바다에 별처럼 박힌 섬들, 순박한 어촌 풍경까지 넌지시 눈과 가슴에 담다 보면 ‘섬에 머물고 있다’는 실감에 사로잡힌다.

진도대교 전남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여름 한가운데에서, 자연의 울림

뭍과 비교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섬에서는 자연을 한껏 만끽해야 한다. 진도에서는 시선을 어느 곳에 두어도 산과 바다, 흙과 물, 녹음과 쪽빛이 차고 넘친다. 절정의 여름날을 즐기려거든 운림산방으로 향하자.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자 조선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의 화실이 자리한 곳이다. 여름에는 진득한 초록 물감이 부려놓은 마티에르처럼 입체적인 모습을 선사한다. 진도에서 가장 높은 첨찰산의 상록수림에 폭 둘러싸인 곳으로, 이 풍경에 몸을 담그면 답답하고 복잡한 현실이 까마득해지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소치 화실 앞에 자리한 연못에는 청초한 수련이 한가득하다. 물 위로 얼굴을 빼꼼히 내민 순백의 꽃 그리고 둥그스름한 초록 잎이 색의 대비를 이룬다. 못 한가운데에는 허련이 직접 심었다는 배롱나무가 서 있다. 나무의 그림자가 은은한 물살 위에 아른거리고, 잉어가 유유자적 노니는 풍경이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그 옆에 자리한 두 곳의 갤러리에서는 허련 일가의 작품과 예술혼을 오롯이 목도할 수 있다.

진도는 바다마저 특별하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신비의 바닷길은 1년에 네다섯 차례 바닷물이 갈라지고 육지가 드러나는 풍경을 보여준다. 바다가 열리는 시간을 맞춰서 가면 삐에르랑디공원에 꼭 오르자. 바다가 꼭꼭 숨겨놓은 길이 드러난 장관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운림산방 전남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 315

붉게 드리운 삶의 낙관

사면이 바다인 섬을 누리는 또 다른 방법은 드라이브다. 진도대교에서 세방낙조 전망대까지 이어진 해안도로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될 만큼 매력적인 풍광을 자랑한다. 달리다가 잠깐 차를 세워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싶어질 정도. 차창 밖으로 바다와 돌산, 논과 밭을 곁에 두고 달리다 보면 세방마을에 다다른다. 한반도에서 가장 늦게까지 해넘이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드라마틱한 일몰이 연출된다. 해질녘이 되자 사람들이 전망대로 모여든다. 곡섬과 솔섬, 잠두도, 가덕도, 불도 등을 품은 진도 앞바다가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어느덧 섬과 섬 사이로 빛이 빨려 들기 시작한다. 은은한 저녁노을에 살포시 얼굴을 붉힌 바닷물. 태양은 점점 제 몸을 불태우며 다도해를 뻘겋게 물들인다. 물비늘과 중첩된 붉은빛이 몽환적인 감성을 자아낸다. 해가 자취를 완전히 감출 때까지, 그 어떤 수식도 무용해진다. 그저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풍경은 눈을 거쳐 마음으로 전달될 때라야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하루치의 삶을 뜨겁게 살아낸 태양이 안녕을 고하는 순간은 이별이 아니라 또 다른 내일을 위한 시작을 의미하는 터. 지는 노을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건 희망이 아닐는지. 외로이 떨어진 채 꿋꿋이 생명력을 이어온 섬, 진도가 우리에게 전한 메시지는 삶의 낙관이었다.

세방낙조 전망대 전남 진도군 지산면 가학리 산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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