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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만드는 웹진 2025년 5월  340번째 이야기

2025년 5월  340번째 이야기

도시와 역사

두 가지 높은 뜻을 받들다

안동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도시는 어디일까? 서울? 부산? 아니다. 면적 1521㎢로 서울의 두 배 반이 되는 경상북도 안동이다. 물론 면적만 그렇다. 인구는 약 15만 7000명으로 세종시의 절반도 안 되며, 대한민국 도시 가운데 60위권을 맴도는 중소 도시이다. 그나마 인구가 계속 급감하는 추세지만, 2008년부터 경상북도 도청소재지가 되면서 조금 나아지고 있다.

역을 안정시키는 나라의 요새

안동은 언제부터 안동이라 불렸을까? 930년에 고창에서 왕건이 견훤을 대파해 앞서 공산에서 겪었던 치욕을 씻는 한편, 후삼국 통일의 승기를 잡았다. 그 기념으로 고창에 안동(安東)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중국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에 설치한 안동 도호부나 압록강이 한중 간 경계가 된 뒤 그 왼편인 지금의 단둥에 정한 안동이라는 이름과 같다. 의미도 ‘동쪽 지방을 (눌러) 안정시킨다’는 뜻으로 같다. 왕건은 안동을 영남 지역을 안정시키는 요새로 생각했다.

안동은 한때 영남의 중심이자 나라의 중심이던 경주와도 경쟁했다. 1197년에 청도와 울산을 근거로 일어난 김사미-효심의 난 진압에 공로를 세웠다고 안동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204년에는 경주에서 십여 년 동안 이어진 패좌의 난 진압의 공로로 안동대도호부가 되었다. 당시 실권자 최충헌에게 누군가가 “동경(경주)을 두고 안동을 이처럼 우대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라고 하자 최충헌은 “신라를 부흥시키네 뭐네 하며 동경을 중심으로 난을 오래 일으켰으니 벌주지 않을 수 없고, 안동은 그 난을 진압함에 충의를 다했으니 상을 주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경주의 일부를 떼어 안동에 붙이고, 경상주도(慶尙州道)를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로 바꿔 부르게도 했다. 경주 세력의 견제 등 여러 이유로 한때 부주목으로 격하되었으나 1361년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했던 공민왕이 개경으로 올라갈 때 안동의 공로를 치하해 안동대도호부로 다시 승격시켜 준다.

적어도 고려 말까지 안동은 정신문화의 수도라기보다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 ‘땅이 메마르다’고 표현되었듯, 대구처럼 경제력을 바탕으로 영남의 주요 도회가 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안동은 오늘날과 같은 정체성을 갖게 되었을까?

동, 두 개의 탑

안동은 전탑의 도시라고도 한다. 국내 최대의 전탑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을 비롯해서 4기의 전탑이 있고, 무너져 사라진 탑들까지 포함하면 10기 안팎의 전탑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 불교 유물이 석탑 위주임을 생각하면 매우 독특하다.

어째서일가.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지역에서 의상대사가 화엄종의 가르침을 활발히 펼쳤다는 점을 근거로 드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의상이 창건한 사찰은 전국에 많다. 그러나 대체로 이름을 빌린 경우이고 영주의 부석사와 안동의 봉정사 등 몇몇만이 의상 또는 의상의 제자가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다. 화엄종의 가르침은 ‘전체는 하나이며 하나는 전체이다’라는 원융(圓融)을 근본으로 한다. 이를 현실에 적용하면 통일신라의 삼한 통합 또는 여러 신분 융합의 배경이 된다. (중략)

한편 안동의 석탑은 전탑과 대조적이다. 8세기 말 원성왕 때 세워진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통일신라 안정기의 힘과 자신감을 담고 있다. 그에 비해 봉정사 삼층석탑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두 탑은 전탑과 석탑이라는 것 외에도 다른 점이 많다. 위엄 있게 우뚝 서 있는 17미터 높이 전탑에 비해 3미터를 약간 넘는 석탑은 그리 위풍당당해 보이지 않는다. 또 더 후대에 지어졌음에도 파손과 마모가 심하고 불에 탄 흔적 등도 많아서 신라의 석탑들에 비해 초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인지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국보 제16호인 데 반해 봉정사 삼층석탑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에 그치고 있다. 봉정사가 극락전 등의 국보 둘, 화엄강당 등 보물 여섯이 있는 당당한 고찰이라는 사실과는 모순된다.

동, 두 곳의 서원

『세종실록지리지』는 안동을 메마른 땅이라고만 여겼으나 몇백 년 뒤의 『택리지』는 같은 땅을 ‘신령이 서린 복된 땅’이라고 묘사했다. 비록 경상좌도의 일부로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이 곤궁한 점은 어쩔 수 없으나, 사람들이 윤리를 밝히고 학문을 중시한다. 아무리 궁벽하고 작은 마을이라도 어디서나 책 읽는 소리가 들리며, 해진 옷에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살지언정 도덕과 성리(性理)를 논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비가 뿌리내리고 살 만한 고장이라는 뜻이다.

불교에 사원이 있다면, 유교에는 서원(書院)이 있다. 공자를 비롯한 성(聖)과 주희, 안향 등 현(賢)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종교적 기능과 이름난 선비를 중심으로 학문을 닦고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연구적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다. 한국 최초의 서원은 1542년 인근 영주에 세워진 소수서원이다. 하지만 안동에는 1570년 고려의 학자 우탁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역동서원을 시작으로 어느 고장보다 많은 서원이 들어선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된서리를 맞긴 했어도 이후 다시 열린 서원들을 포함하여 현재 17개의 서원이 안동시 내에 있다. 그 가운데 단연 으뜸을 꼽는다면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이다. 이 두 서원은 2019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9개 서원에 포함된다(2곳의 서원이 등재된 도시는 안동 뿐이다).

도산서원은 1574년, 4년 전에 서거한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며 세웠다. 설립 1년 만에 사액 서원이 되었고, 서당을 포괄하듯 서원이 지어져 있는 독특한 구조인데 서당은 이황이 생전에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이곳에서 수백 년 동안 퇴계 학맥이 양성되었고, 현대에도 이어져 퇴계학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에는 제사하고 공부하고 기숙하는 공간이 아니라 관광객들이 여기저기 구경하는 공간이 되었다. 한자를 잘 아는 방문객이라면 학당에 걸려 있는 무수한 현판 가운데 퇴계가 여기서 살며 지은 「도산십이곡」을 알아볼 것이다.

고인(古人)도 날 못보고 나도 고인 못봬,
고인을 못 봬도 가시던 길 앞에 있네.
가시던 길 앞에 있다면 아니 가고 어찌하랴.

도산 서원 법흥사지 칠층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