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궁궐, 왕들의 잔혹사 : 종로-중구 권역
병자호란 이후 전란과 반란으로 얼룩졌던 질풍노도의 시기가 끝나고, 조선과 한양은 조금씩 원래 모습으로 회복되어 갔다.
1657년 8만 명으로 집계된 한양 인구는 점차 늘어나 1669년에는 20만 명에 이르고, 그 뒤 조선 말엽까지 그 선이 유지되었다. 조선 전기의 한양이 청계천을 경계로 북쪽(종로구 지역) 위주였던 데 비해 후기에는 남쪽(중구 지역)도 발달했다. 북쪽의 북촌(가회동과 안국동 일대)은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의 사이에 낀 입지 조건 때문에 권력과 재력, 지력에서 조선의 1퍼센트였던 명문대가(경화사족)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들은 맑고 고운 경치와 풍류를 찾아 북악산 기슭으로 깊이 들어가 별장과 정자를 짓고 놀기도 했는데, 전설 속 신선들의 마을 이름을 따서 그곳을 자하동(紫霞洞/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일대)이라 불렀다.
청계천 남쪽의 남산 자락, 지금의 회현동과 장충동 등에는 남촌이 발달했다. 이곳에도 나름 명문 양반들이 모여 살았으나, ‘조선의 1퍼센트’라고 하기엔 부족했다. 유성룡이나 정약용 등 남인이나 소론 명망가들의 한양 주거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북촌 양반들에 대한 질투 내지는 오기가 발동했던지 조선 말기, 개화기, 일제강점기가 될 때까지도 이곳의 일부 선비들은 새로운 문물에 대한 적응을 거부하며 해진 옷에 나막신을 신고 다니면서 자존심 하나로 삶을 살았다. 그래서 경탄 반, 조롱 반의 ‘남산골샌님’이란 소리를 듣곤 했다.
이 부근엔 시장도 발달했다. 조선 전기에는 종루가 서 있던 종가(鐘街), 즉 종로에 육의전이 들어서서 한양 상권의 핵심이 되었는데, 이들이 조정에서 받은 금난전권 때문에 한양 도성 안에는 18세기 말까지 다른 상점이 들어설 수 없었다. 도성에서 살짝 벗어난 곳이라면 괜찮지 않았을까? 그래서 소의문(서소문) 밖에 칠패시장이 형성되어 번화한 모습을 이루었다. 그 규모는 점점 커져서 서소문에서 남대문 밖 일대가 모두 시장 바닥이 되었다. 개화기에는 이것이 교통을 방해하고 집단 소요의 무대가 될 수 있다고 여겨져 성 밖의 시장을 없애고 대신 남대문 근처의 선혜청 앞에 장터를 새로 마련해 주었다. 이것이 오늘날 서울의 대표적 전통시장인 남대문 시장이다.
조선 말기, 개화의 꿈과 국권 상실의 아픔이 교차하던 혼란기에 한양의 중심에 서 있던 군주는 고종이었다. 그는 묘하게도 ‘중구의 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조선 궁궐 중 유일하게 중구 정동에 있는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삼았고, 바로 그 앞에 원구단을 세워 황제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행사를 치렀다.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된 고종은 국권 상실 후 이태왕(李太王)이라는 괴상한 이름으로 불리며 덕수궁이라 개칭된 경운궁에서 말년을 보냈다.
반면, 북쪽의 종로구는 그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겨준 곳으로, 한 나라의 국권이 무참하게 뒤흔들리는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1872년 경복궁이 중건되었다. 임진왜란 이래 수백 년간 폐허로 남아있던 이곳을 흥선대원군이 온 국력을 쏟아 중건했다. 명분은 왕권 강화였으나 큰 공사를 통해 자기 손에 인력과 재력을 쥐려는 속셈도 있었다. 사회와 경제가 퇴락하는 가운데 궁궐을 만든다는 무리수를 쓰니 민심 이반이 컸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를 대느라 멀쩡한 경희궁을 허물기도 했다.
1876년에는 경복궁에 불이 나 830여 칸의 건물이 잿더미가 되었다. 범인은 다름 아닌 흥선대원군으로 추정된다. 그토록 애써 다시 지은 경복궁을 4년 만에 태운 것은 고종이 친정에 나서고 자신이 배제된 데에 따른 원한과 증오 때문이었다.
그리고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모두가 흥선대원군의 권력욕에 국내외의 세력이 개입해 빚어진 사태였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몇 번이나 사선을 넘다가 끝내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다.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참변까지 일으키며 실권을 장악한 일본을 피해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을 결행한다. 궁궐에서 몰래 빠져나와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이다. 그리하여 고종의 중구 시대가 열린다.
즐거운 추억도 없진 않았다. 특히 1887년에 중국이나 일본보다도 빠르게 경복궁에 전신을 설치해 야간 조명을 켰던 일은 고종에게 아름다운 추억이고, 한국사의 기꺼운 기록이다. 하지만 그때 고종의 옆에서 환호하던 국모는 8년 뒤 바로 그곳에서 입에 담을 수 조차 없는 일을 당하지 않았던가.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무너지는 나라를 수습할 힘이 없었다. 1905년, 경운궁 중명전에서 을사조약이 이뤄져 국권이 댑분 상실되자, 그는 의병을 부추기고 헤이그 밀사를 보낸 끝에 1907년 강제 퇴위 되었다. 1919년 암살의 정황이 상당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고종은 내내 덕수궁에서 살며 이왕직의 일본인 관료들에게 ‘덕수궁 전하’라는 통칭으로 불렸다. 순종은 ‘창덕궁 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