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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만드는 웹진 2025년 10월  345번째 이야기

2025년 10월  345번째 이야기

도시와 역사

우리나라 대표 산업도시

울산

울산광역시는 면적 1060제곱킬로미터에 인구는 114만 명 정도다. 면적은 남한 도시 가운데 7위이고 특별·광역시 가운데서는 제일 큰데, 인구수는 8위, 특별·광역시 중에서는 7위이며 수원보다 적다. 대도시이기는 하나 서울, 대구, 대전, 광주 등처럼 그 지역에서 인구가 가장 집중되는 도시는 아니라는 뜻이다. 부산, 인천과 더불어 남한 3대 항구도시이자 산업도시다. 현재 시민 1인당 GDP도 전국에서 가장 높다.

가 방위의 최전선, 왜구를 막아라

울산은 일상을 잊을 신화와 꿈이 있는 곳, 해방과 낭만의 고장이라는 색깔을 오래 간직해 왔다. 그러나 14세기 말 이후, 울산은 다른 의미로 중요성이 부각된다. 바로 군사 방위에 중요한 도시가 된 것이다.

“왜가 동래와 울주(蔚州/울산의 당시 이름)를 불태우고 약탈하여 세미(稅米) 실은 배를 빼앗아 갔다. (1361년)” / “왜적이 울주, 양주, 밀성을 침범하여 거의 다 불사르고 노략질하며, 또 언양현을 침범하였다.(1377년)” / “왜적이 울주에 머무르면서 벼와 기장을 베어 양식을 삼고, 기장, 언양까지 침노하니, 땅을 마치 빗자루로 쓴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1379년)”

이처럼 고려 말, 공민왕에서 우왕에 이르는 동안 왜구가 울산을 침략한 사건은 12차례에 이른다. 왜구는 울산을 노략질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인근 고을들을 침략했다. 나아가 개성 쪽으로 북상하려고까지 했으므로 울산 바위가 국가의 중대한 과제가 되었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진다. 조정은 대마도 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가 어려워 왜구가 자꾸 발생하는 것임을 알아챘다. 그래서 그들이 왕래하며 경제교류를 할 수 있도록 항구를 열어주게 된다. 처음에는 부산포와 내이포만 열었으나, 1427년에 대마도에서 추가 요구를 해와 울산포를 여니 이것이 삼포(三浦)다. 이렇게 회유책을 쓰는 한편으로 울산에 진(鎭)을 설치하고, 나중에는 도호부까지 두어서 군사 방비를 강화하려 했다. 1477년에는 울산읍성을 새로 쌓았는데, 높이가 15척(당시의 단위로 약 7미터)이고 둘레가 3639척(약 1.7킬로미터)으로 동시대에 쌓은 다른 성들에 비해 특별히 높고 견고하게 지었다.

하지만 1510년의 삼포왜란으로 염포는 다시 폐쇄되었고, 16세기 내내 조선과 대마도의 긴장관계가 해소되지 못한 상태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첫 싸움인 부산 공방전에 울산군수 이언성도 참전했으나, 동래부사 송상현이 끝까지 분전하다 전사한 반면, 이언성은 왜군에 항복해 버렸다. 그렇지만 울산은 결코 맥없이 적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관이 손을 들자 민이 나섰다.

“상인(常人)으로 말한다면 울산의 백정 장오석, 사노비 김선진 등이 모두 온 힘을 다해 싸워 공이 컸습니다.”
“도원수의 말에 의하면 울산 사람들이 제일 정예롭고 용맹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울산 백성들의 용기와 충혼은 선조도 감동시켜, 전후에 웬만하면 의병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그도 울산에는 후한 포상을 내렸다. 하지만 역부족은 역부족이었다. 정유재란이 터지자 울산은 왜군의 주장 가운데 하나인 가토 기요마사에게 점령되었다. 그는 기존의 울산성을 더 강력하고 견고하게 증축해 본거지로 삼아서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와 함께 왜군의 3대 거점을 이루어 한양 공략을 추진했다. 하지만, 직산전투로 왜군의 북상은 저지되었고, 조명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왜적을 뿌리 뽑고자 울산으로 쳐들어갔다. 그리하여 1597년 말에서 1598년 초까지 11일 동안, 왜란 전체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던 울산성 전투가 벌어진다. (중략) 11일 만에 양쪽 모두 6,000명가량의 전사자를 내고 끝난 전투였다. 이후 가토는 서생포로 물러나서 재정비를 하고 다시 울산으로 돌아온다. 조명연합군도 다시 한번 울산을 공격하지만 역시 실패한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만이, 조선을 먹고 중국을 삼키고 전 아시아에 군림하려던 그의 헛된 꿈의 스러짐만이 가토를 울산에서 영영 떠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떠날 때 수많은 조선인 포로를 끌고 갔다. 그래서 그의 영지였던 구마모토에 우루산마치가 생겨나기도 했다.

국 중공업의 메카가 되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울산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면서 돌아왔다. 울산은 특히 일본과 가깝다는 점 때문에 통감부 시절부터 전화선을 가설하고 우체국을 세우는 등 근대적 교통과 통신 인프라 개발이 빨리 이뤄졌다. 1928년에는 공항까지 만들어졌다. 시의 규모도 커져서 임진왜란 당시에는 주변 지역이었던 서생포, 언양 등이 모두 울산으로 흡수되었다.

한편 전통적으로 내려온 어업도 일제강점기 전후로 근대적이고 산업화된 형태로 발전했다. 고래잡이는 물론이고 방어진의 방어 그리고 멸치, 갈치, 청어 등을 잡는 연근해 어업에서 원양어업까지 성장해 나갔다. 원양어업은 해방 이후부터 본격화 되었다. 1969년에 안타깝게도 남태평양에서 조업 중 침몰하여 원양어선 사고 제1호로 기록된 남해호 승무원들을 기리는 비가 간절곶에 서 있다.

대한민국의 울산이라고 하면 모두가 현대의 울산을 떠올릴 것이다. 특정 기업의 상호와 현대화된 한국 중공업의 메카인 울산이라는 뜻이다. 1968년에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이 준공되어 1976년부터는 자동차 수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울산 현대조선소는 1973년, 방어진에 세워졌다. 1974년에 한국 최초로 유조선 애틀랜틱 배런호를 건조했는데, 도크를 만들면서 동시에 배도 만들었다는 진기록을 세웠다. 유조선 진수식은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한 정관계 거물들이 수두룩하게 모여서 진행했다. 국가 최도지도자가 울산 바닷가에 온 것은 신라 헌강왕과 고려 성종 이후 처음이었다. (중략)

지금 울산에는 현대자동차 제1공장~제5공장이 있으며 이는 자동차 생산단지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현대중공업 본사와 현대미포조선 본사, 635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매머드급 조선소도 있다. (중략)

1980년대 이래 꾸준히 상승해 온 현대 계열 종사자들의 임금 덕에 지역 경제도 풍요로운 편이며, 울산 시민들의 일반적인 소비나 문화 수준도 높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나 발레단 등이 내한하면 서울과 울산 두 곳에서만 공연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두 도시에서만 모객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울산 지역 고등학교 학생들의 학생부에는 특별활동으로 베를린 필하모니가 연주하는 베토벤 교향곡 감상, 레오나르도 다빈치 회화전 관람 등이 흔하게 나온다고도 한다.

현대조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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