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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만드는 웹진 2025년 8월  343번째 이야기

2025년 8월  343번째 이야기

도시와 역사

어디로든 통하는 길

천안

천안은 면적 636제곱킬로미터. 인구는 66만 명 정도 된다. 면적상으로 충청남도에서 공주, 서산, 당진에 이어 4번째로 크며, 인구 상으로는 가장 크다. 조선 시대까지 천안부와 별도로 직산군과 목천군이 따로 있었으나 1914년 이후 통폐합되었다.

근대 한반도 최고 교통의 요지

천안삼거리 흥 / 능수야 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서 / 휘늘어졌고나 흥
에루화 에루화 흥 / 성화가 났구나 흥

누가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민요인 「천안삼거리」다. 그 첫연에 나오는 버드나무는 오늘날 천안시의 시목이 되었다. ‘천안’하면 곧 버드나무를 떠올릴 정도다. 강릉의 소나무에 비해 버드나무는 유연하고 관능적인 이미지가 뚜렷하다. 나무 자체가 제멋에 겨워 휘늘어진 듯,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휘휘 구불거린다. 예부터 길가에 많이 심다 보니 이 사람 저 사람 스쳐가며 잎을 따서 짐짓 우물물 뜬 바가지에 띄워도 보고, 잎을 솜씨 있게 잘라서 버들피리도 불어보며 희롱하는 소재도 된다. 화류계, 노류장화라는 말에서 버드나무 류(流)가 나오듯 깊은 산속 고고히 서서 독야청청하는 소나무와는 정반대의 이미지가 있다.

천안삼거리는 그런 버드나무가 양쪽에 늘어서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춤추듯 구불거렸다. 천안은 호서와 호남을 잇는 길, 영남을 잇는 길, 경기를 지나 이북으로 올라가는 길이 하나로 모이는, 전근대 한반도 최고의 교통 요지였다. 옛 기록을 볼 때마다 “천안에 이르러 쉬었다가 다시 출발했다”, “천안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길을 떠났다”를 비롯해 심지어 “피란길에 임금을 따르던 자들이 천안에 오자 각각 흩어져 달아났다”라는 등의 언급이 수없이 나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교통의 요지는 누가 장악하고 있는지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천안이 천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기원도 그런 맥락이다.

930년. 후삼국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던 왕건이 대목군(大木郡)에 왔다. 그때 예방(倪方)이라는 술사(術師)가 왕건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이곳이야말로 삼국의 중심으로, 다섯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세입니다.
만일 3000호의 고을을 두고 이 땅에서 군사를 훈련한다면, 백제가 스스로 와서 항복할 것입니다.
-『동국여지승람』

지만 큰 열사들의 독립운동

이제까지의 경우를 보면 천안은 직접 봉기의 선봉에 서기보다는 반란의 무대가 되거나 배경이 되는 식이었다. 오룡이 여의주를 다투는 교통의 요지였기에 그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이 도시가 민중 봉기의 주역이 되는 때가 찾아왔다. 바로 1910년의 납세거부운동, 그리고 1919년의 천안 3·1운동이었다. 천안은 앞서 본대로 청일전쟁의 성지가 되었고, 또 1899년부터는 그곳의 금광을 채굴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유난히 많이 모여들었다. 그만큼 민폐도 심했고, 수탈과 행패도 많았다. 그리하여 한일병합이 이루어지기 직전인 1910년 3월에는 통감부의 전횡에 대항하는 의미로 전국 최초로 천안에서 납세거부운동이 벌어졌다. 수세관이 장터에서 가마니를 파는 상인들에게 뺨을 때리는 등 폭행까지 하며 마구잡이로 세금을 거두려 한 일이 도화선이 되었다. 격분한 가마니 상인들, 나아가 장터 상인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어 수세관들을 몰아내고, 수세관 사무소로 몰려가 장부를 찢고, 사무소를 불태웠다. 이는 가혹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 세금을 일절 거부하자는 운동으로 이어져, 1000여 명 이상이 시위에 동참했다. 이후 전국 곳곳에서 진행된 맙세거부운동의 시작이면서 충청도 최초의 항일 시위였다.

그리고 1919년, 병천의 아우내장터에서 “독립 만세!” 소리가 울려펴졌다.

4월 1일이었다. 3·1운동을 전국에서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한 뒤 고향에 내려온 유관순 등 물밑 작업을 거쳐 3월 14일 목천공립보통학교, 3월 20일 입장장터, 3월 29일 천안읍, 3월 30일 풍세면, 3월 31일 성환읍 만세 시위를 지나, 4월 1일 아우내장터의 약 3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만세 운동까지 숨 가쁘게 이어졌다. 일제는 아우내에 이르러서는 실탄을 쏘고 총검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서서 유관순의 아버지인 유중권, 어머니 이소재를 비롯한 19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유관순 등은 중상을 입은 상태로 투옥된 뒤 장기 복역을 하다가 옥사했다. 서울을 제외하고는 가장 대대적이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천안 3·1운동이었다.

3·1운동이 일제강점기를 직접 끝장내지는 못했지만, 그 불꽃이 살아남아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불길을 이어갔음은 잘 알려져 있다. 천안 아우내장터의 3·1운동도 그랬다. 1년 뒤에 민재기, 유병엽 등의 노력으로 직산 구락부라는 결사가 만들어졌다. 현지 청년들의 자체 교육 수련을 표방했으나 실체는 3·1운동의 불씨를 계속 살리자는 것이었고 1920년 5월에 다시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천안에서 나고 자라서 이 전말을 보거나 들었던 이동녕, 조병옥 등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의 깃발을 계속 휘둘렀다. 불의에 저항했던 천안 사람의 정신은 독립운동사와 한국 근대사에 지워질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것이다.

1987년, 천안 3·1운동을 포함한 처절했던 독립운동사를 길이 기억에 남기기 위한 독립기념관이 천안 땅 동남구 목천읍에 세워졌다. 이 기념관이 3·1운동이 시작된 서울이나 그 밖의 도시가 아니라 천안에 세워진 것은 헌법에 3·1운동의 정신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기로 표명한 대한민국이 내린 사려 깊은 결정이다.

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오늘날, 천 년이 넘도록 한반도의 중심이자 교통의 최고 요지였던 천안삼거리는 본색을 잃었다. 현대에 들어선 고속도로-국도 체계와 항공 운항로 때문에 그 지점이 더 이상 절호의 요지라고 보기도 어렵고, 신시가 조성계획 때문에 아예 삼거리 자체가 정규 도로에서 밀려나 버렸다. 그 자리에는 공원만이 덩그러니 들어서서 천안삼거리의 옛 명성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천안시 자체는 활기를 간직하고 있다. 한때(갑오개혁 직후) 천안을 통합하기까지 했던 충남의 ‘맏형’ 도시인 공주는 오늘날 지속적 인구 감소에 따른 고민을 겪고 있는 반면, 천안은 그 6배에 가까운 인구를 자랑하며 아직도 발전 가능성이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제 천안의 경쟁자는 공주가 아니라 광역시인 대전이다. 그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까닭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수도권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는 교통 강점도 작용한 듯 싶다. 삼성, 현대, 이랜드 등의 대기업이 서울·경기 외에 천안에 수도권 거점을 마련한 점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