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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만드는 웹진 2025년 12월  347번째 이야기

2025년 12월  347번째 이야기

도시와 역사

돌아올 봄날을 희망하는 예술의 고장

남원

전라북도의 남원시는 소백산맥 자락에 위치하며, 지리산을 끼고 있다. 면적 752제곱킬로미터에 인구는 8만 명 정도이다. 면적은 부산에 좀 못 미치지만 인구는 그 4분의 1도 안 된다. 인구 규모로 전국 시 가운데서 85위 남짓, 전라북도에서도 7번째로 10만 명에 조금 못 미치는 완주군보다 적다. 하지만 전근대 시대에는 호남의 중요 도시 중 하나로 손꼽혀 왔다.

향이면서 안보의 핵심인 도시

가야금은 거문고에 비해 날렵하고 경쾌하여, 배우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좀 더 많은 편이다. 그 시조라고 할 만한 가야 출신의 우륵이 551년, 하림궁에 들렀던 신라 진흥왕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하여 멸망한 금관가야의 예술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때 연주한 곡이 12곡이라는데, 7번째로 연주한 곡의 이름이 「하기물下奇物」로, 경쾌한 노동요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하기물이 남원을 가리킨다는 추정도 있다. 6세기, 백제 무령왕 때 가야를 공격하여 그 땅을 일부 빼앗고 고룡군古龍郡을 설치했는데 이 고룡군이 하기물이라는 것이다. ‘용龍’은 우리말로 ‘미르’이고 ‘고’는 ‘키’ 발음을 옮길 때 쓰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키미르는 고룡이고, 하기물은 그 아래쪽이라는 것인데(한편 상기물은 지금의 장수 또는 임실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지 의문인 점도 있다. 하지만 남원의 역사적 첫 기록이 망국의 예인이 연주하는 음악이라니, 과연 남원다운 시작이다. 광주에지지 않는 호남의 예향藝鄕이 곧 남원이다. 한과 아쉬움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희망을 승화시킨 예술의 고장이 남원이기 때문이다. 역시 고대의 예향인지 신라의 옥보고가 이 남원경에 살면서 고구려의 거문고를 전수하고, 개량하여 명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남원이 남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때는 진흥왕의 후대인 문무왕이 삼한을 통일하고, 이곳에 5소경의 하나인 남원경南原京을 설치하고부터다. 신라가 5개밖에 없는 소경小京 중 하나를 이곳에 두었음은 특별한데, 그것은 예향이라서가 아니라 당시 남원이 전주(대략 지금의 전북), 무주(전남), 강주(낙동강 서편의 경남)가 접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을 장악해 두면 세 지역 중 어느 쪽에서 반란이나 외침이 있어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중략) 고려시대에도 남원은 요충지였다. 940년에 남원경을 남원부로 고치고, 현종 때는 임실·순창·장수·구례·담양 등 지리산 자락에 가까운 일대의 행정을 도맡는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임순남’이라고 묶어 부르는 임실·순창·남원의 핵이 남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려 말에 가면 왜구의 침입이 심해졌는데, 남원 쪽으로 침입해서 그 동쪽의 팔랑치 고개를 지나 경기도나 경상도로 밀고 들어가려는 추세가 있었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1380년, 이성계의 가장 빛나는 전투 중 하나인 황산대첩이었다.

날의 남원을 좋아하세요?

조선 중기 이후, 개화기 이전의 남원은 두 가지 주제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광한루이다. 광한루는 처음에 황희가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바꾸는 일에 반대하다가 남원으로 귀양을 왔을 때(1419년) 짓고는 광통루廣通樓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앉아서 술 마시며 독서하던 곳이다. 황희는 귀양이 풀려 조정에 돌아간 뒤로 자신이 반대했던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명재상이 된다. 귀양살이 도중에 지었으니 당시는 그리 응대하거나 화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광통이라는 이름도 남원이 전라도와 경상도의 교통 요지이기 때문에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1444년에 전라도 관찰사였던 정인지가 이곳에 들렀다가 너무도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했다고 한다. 그리고 남긴 말이 “이건 광통루가 아니라 광한루일세!”였다나. 광한루廣寒樓는 달 속에 살고 있는 미인 항아가 거처한다는 신화 속의 누각이다. 그토록 아름답다는 의미였는데, 이쯤 되니 어디 한번 나도 보자는 시인 묵객들이 전국에서 모여들게 된다. 이러니 아예 이름도 광한루로 바꿔버리고, 달나라 광한루를 표현하고자 은하 연못도 파고 오작교도 놓고 하면서 점점 더 아름답게 바뀌었다. 이에 반한 여러 문인들 가운데, 1626년에 우의정이던 신흠은 『광한루기』를 지어 이렇게 예찬했다.

호남과 영남의 언저리에 끼어 하나의 큰 도회都會가 되는 곳이 남원이다. 산과 물이 모여드는 곳으로 그 가운데서 광한루는 산수의 전경을 다 갖추고 있는 곳이다. (…) 그곳 승경을 살펴보자면 그 누대를 중심으로 하여 서쪽에는 교룡성이 있고, 남쪽에는 금계산, 동쪽에는 방장산이 있으며, 물은 방장산에서 발원, 구불구불 멀리멀리 흘러내려 요천蓼川이 되고 다시 꺾어져서 광한루 앞에 와서는 하나의 호수로 변하여 깊고 맑기가 마치 하늘의 은하수가 기성箕星, 미성尾星 사이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부열성傅說星을 거치고 북으로는 귀수龜宿를 거쳐 깃과 띠처럼 두르고 있는 것과 같다. (…) 호수 위에는 공중에 걸쳐 있는 다리 넷이 있는데, 흡사 무녀 婺女 별이 은하를 건너가도록 신선들이 모여 일하여 그 다리가 놓여지나 하늘이 평지처럼 된 것과도 같다. 이름을 오작교라고 한 것은 그에 견주었다. 그리고 이 온갖 승경을 총망라하여 그 어름에 누대를 세웠는데, 무지개 같은 대들보에 단청한 두공, 진주를 꿴 듯 늘어뜨린 발, 구슬처럼 빛나는 창문은 마치 오성십이루 五城十二樓를 붉은 구름이 가리워 진짜 신선이라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경지다. 이름을 광한 廣寒으로 한 것도 아마 그런 뜻이었으리라.

-수산, 『광한루기』

너무도 침이 마르게 찬사를 늘어놓았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때로 가 신흠의 옆에 서서 달빛 비치는 광한루를 바라보고, 연못가를 산책하고만 싶어진다. 이런 광한루의 전설적인 아름다움은 결국 한국사에서 빼어난 문학작품,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중략)

글공부에 지친 이몽룡이 방자를 졸라 광한루에 놀러 가고, 역시 봄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성춘향이 광한루 근처로 나와 그네를 뛰면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정인지나 신흠 같은 나이 든 남성이 달빛 쏟아지는 여름밤의 광한루를 꿈꾸었다면, 젊은이들은 밝은 햇빛 아래 꽃향기와 푸르른 물이 가득한 봄날의 광한루를 그렸던 것이다. 「춘향전」의 줄거리는 모두가 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배경으로 했다는 설이 있다. 이 도령은 성이성이라는 이름의 조선 중기의 실존 인물로, 남원부사인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왔다가 어느 기생과 사랑을 했다. 그 뒤 한양으로 돌아갔다가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을 다시 찾았으나, 그 기생은 이미 죽은 후였다고 한다. (중략)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현대의 지성, 이어령은 이렇게 말했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의 유명한 옛이야기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사람의 뜻이 지극하면 하늘이 감동하여 기적을 베푼다’라는 것이다. 춘향의 절개, 심청의 효심, 흥부의 자애는 모두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대부분의 민초들의 비원이었다.

광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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