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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만드는 웹진 2025년 9월  344번째 이야기

2025년 9월  344번째 이야기

도시와 역사

솥처럼 다시 끓을 날을 기다리며

부산

부산광역시는 한반도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도시다. 부산의 면적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769제곱킬로미터로 대한민국 24위이며, 원주보다 좁고 남원보다 넓다. 하지만 인구수는 335만 명 가량으로 서울 다음인 2위다.

저 온 식민지배로 쫓겨난 사람들

이전에도 종종 왜구의 습격이 있었지만 임진왜란의 부산포전투는 고대 이후 부산이 겪은 최대의 전란이었다. 1592년 4월 13일에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고니시 유키나가의 함대는 부산첨사 정발에게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이니 길을 빌려달라’라고 통보했으며, 거절당하자 14일 아침부터 부산성을 들이치기 시작했다. 정발은 성을 지키던 조선군 1,000명과 함께 분전했으나 고니시의 군대는 1만 8,000명가량이었기에 수적 열세로 정발을 포함한 대부분의 조선군이 전사했다. 부산성을 점령한 왜군은 인근 다대포, 서평포까지 장악하고는 동래로 진격했다. 동래부사 송상현 등이 최후까지 결사 항전을 했으며, 관군만이 아니라 노비와 의녀들까지 막대기를 휘두르고 기왓장을 던지며 처절하게 싸웠지만 결국 패배했다. 지금의 부산 일대가 왜군에 장악되는 것으로 7년 동안 계속될 잔혹한 대전쟁은 그 서막을 올렸다.

왜란 내내 부산은 몇 번이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의 무대가 되었다. 1592년 9월과 10월의 부산포해전 등에서 이순신 등의 조선 수군이 승리함으로써 경상남도 근해를 넘어 서해까지 진출하려던 왜군 함대의 계획이 꺾였다. 그러나 육전에서 부산의 왜군을 몰아내지 못했기에, 부산 일대는 7년 동안 왜인들의 먼저 온 식민지배를 겪어야 했다. (중략)

국권상실 이후에는 원산과 마찬가지로 부산이 동래를 잡아먹는 과정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동래는 부산부(府)의 일부 구역이 되었고, 온천을 워낙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취향에 맞춰 원래 있었던 온천이 개발되고 기생집들이 들어서면서 도시 외곽의 휴양 지대로 변모했다. 그리고 원래 부산포 중심의 부산은 항만과 시장, 사무소와 공장 지대를 갖춘 현대 도시로 모습을 갖춰갔다. 용두산 주변에 들어섰던 일본인 거류지는 서울의 회현동처럼 번화한 일본인들의 고급주택지구가 되었으며, 본래 부산에서 살던 농민과 어민들은 부산을 둘러싼 여러 산기슭으로 밀려났다. 그들은 거기서 판잣집을 짓고 살며, 낮이면 일본인들이 소유한 공장과 회사에서 막일을 하다가 밤이면 지친 몸을 이끌고 휘황한 유흥가를 지나 어두컴컴한 달동네의 집으로 기어들었다.

어난 명소 속 숨어 있는 역사

최치원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다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분명하지 않은, 신비에 싸인 고대 한국사의 인물이다. 당나라에서도 인정받은 고대 한국의 가장 빼어난 재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묵었다는 동굴, 그가 붓을 씻었다는 시냇물 같은 장소가 방방곡곡에 많은데, 부산 해운대에도 그런 전설이 깃들어 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정처 없이 다니다가 부산 바닷가에 이르자 그곳의 너무도 빼어난 경치에 감탄해 한동안 거기 머무르면서 누대를 쌓고, 자신의 호인 고운(孤雲)에서 ‘운’을 따서 누대 이름을 해운대(海雲臺)로 붙였다는 것이다. 전설이지만 해운대 해변의 바위에는 아직도 해운대라 쓴 석각이 남아 있고, 이것이 아마 최치원의 친필일 거라고 믿어져 왔다.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노상직이 1926년에 쓴 「고운 선생 문집」 중간 서문에도 “선생께서 일단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게 된 뒤에는 해운대, 임경대, 월영대에서 외로운 신하의 분을 삭일 수 있었다”라고 쓰고 있을 만큼 어느새 정설처럼 된 이야기다. 해운대라는 누대는 어느 사이엔가 없어지고 지명만이 남았는데, 동백나무 숲이 유난히 빽빽이 우거져 있으며 그 동백숲은 바다 건너 동백섬까지 이어져 있다. (중략)

오늘날 해운대는 국제도시 부산의 중심이다. 여름이면 세계에서 가장 파라솔이 많이 선다는 해운대해수욕장을 배경으로 특급호텔들과 센텀시티 등 초고층건물들이 속속 들어섰으며, 그에 걸맞는 국제급 편의시설들도 따라 들어섰다. 인구 감소가 걱정거리인 부산이련만, 해운대구는 부산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구역으로 번화함을 자랑하고 있다. 뜻을 펴지 못한 최치원의 고독과 분노, 연인(형제)이 떠난 동백섬을 향해 토하던 울음소리가 지금은 젊음과 사랑을 만끽하는 여행객들의 발밑에 모래처럼 차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무심한 파도와 바람만 역사를 기억할 따름이다. 태종대는 내륙이 아니라 영도, 옛날에는 절영도(絶影島)라고 불렸던 섬의 한켠에 널찍하게 튀어나온 바위를 말한다. 날씨가 좋으면 멀리 대마도가 보이고, 해변길을 따라 기암괴석이 줄을 이어서 전통 시대부터 명승지-관광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일찍이 신라 태종 무열왕, 그러니까 김춘추가 대마도를 정벌하려고 했는데, 그가 출정했을 때 묵었다 하여 ‘태종대’라 한다. 그러나 이 태종이 그 태종이 아니라고도 한다. 1419년, 가뭄이 들자 조선의 태종이 몸을 돌보지 않고 기우제를 지내고 또 지내서 결국 비가 오니 이를 태종우라 불렀다는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기우제를 치른 곳이 바로 이 태종대라는 것이다! 살날이 길지 않은 몸으로 한반도 끝자락까지 내려와 비를 빌었다면 과연 하늘이 감동할 만한 정성이었을 것이나, 가뭄이면 동래부사가 이곳에 와서 비를 빌기는 했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높지는 않은 전설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상왕이던 태종의 동래군 행차 이야기는 없기 때문이다. (중략)

지금 부산시의 가장 북쪽에 있는 금정산(金井山)에는 범어사(梵魚寺)가 있다. 먼 옛날 하늘에서 금빛 물고기가 이곳의 우물에 내려와 놀았다 하여 산에도, 절에도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절 자체의 창건은 8세기경 의상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의상이 지었다는 수많은 절 중에 특별한 근거가 없는 사찰에 속한다. 하지만 화엄종 계열의 명찰로서 최치원이 쓴 『법장화상전』에서도 신라 10대 사찰의 하나로 꼽는 것을 보면 의상이 그 창건자라는 말이 그럴듯하다 싶다.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 휴정이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승병활동을 벌였고, 그 보복이랄지 전화를 입어 절이 깡그리 불타버렸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중창하여 지금 건물은 대체로 조선 후기의 것들이다. 범어사의 일주문은 매우 독특해 보통의 일주문처럼 2개가 아닌 4개의 기둥을 세웠고 상부는 크고 중후하다. 또 대체로 낮고 길게 퍼져 있는 모양새를 띠고 있다. 마치 주인에 충실한 맹견이 언제든 적에게 덤벼들려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자세 같은데 그래서인지 ‘범어사에서 바라보이는 일본의 침략을 차단하고자 이런 형태로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다. (중략)

부산은 삼국 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끝없이 의식해야 했다. 결국 일본이 이 땅의 주인이 되었을 때, 그들이 강제한 문명개화는 부산을 ‘삐까번쩍’한 동네와 잡스러운 동네로 나눠놓았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부산은 잡스러움을 바탕으로 이를 악물고 성장했다. 그리고 싸웠다. 한국 자체가 나이 먹어가는 지금, 그런 잡스러움을 되살려서 다시 이 나라에 활력을 불러올지, 세련되고 첨단을 걷는 방식으로 새 길을 개척할지, 부산의 앞길이 곧 한국의 앞길이다.

해운대석각 태종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