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도청 소재지인 수원특례시의 면적은 121제곱킬로미터다. 대한민국 도시 중 71위로 면적으로만 보면 대도시 같지 않다. 사실 경기 남부의 도시들이 대체로 이렇다. 면적은 작은데 인구는 많다. 수원시 인구는 약 120만 명으로 대한민국 7위이며 울산보다 많아서 사실상 특별·광역시급이다.
고대에서 중세, 근세로 이어지며 이름이 여러 가지로 뒤바뀐 도시들이 많은데 수원은 의외로 일관성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수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 보이는 마한의 모수국(牟水國)이며, 백제로 넘어가서 모수성이 된 다음 광개토태왕이 4세기 말에 한강 유역의 백제 땅들을 빼앗을 때 고구려로 넘어가 매홀군(買忽郡)이라 불리게 된다. 그런데 ‘모수’는 ‘벌(들판)의 물’이며, ‘매홀’은 ‘물의 벌’이라 사실상 같은 뜻이다. 결국 ‘수원(水原(물의 벌))’이라는 뜻이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졌으니(신라 경덕왕은 수성(水城), 왕건은 수주(水州)라 하여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물 많은 고을이라는 뜻은 이어진 셈이다) 한국사에서는 매우 진귀한 예다. 지금 봐도 수원 경내에는 호수가 2곳, 저수지가 5곳이라 물이 많은 도시다운데 과거에는 더했던 것일까?
지금은 크게 와닿지 않지만 전근대 시대에는 도시가 도호부인지, 부인지, 목인지, 군 아니면 현인지가 꽤 중요한 문제였다. 세입 및 세출 등의 규모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번성하기도 퇴락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 수원의 변천은 좀 계면쩍다.
처음 건국과정에서 김칠과 최승규 등 200여 명이 후백제를 배반한 뒤 왕건에게 항복하고 그와 함께 싸워 수주라는 이름을 얻으며 군에서 주로 승격되었다. 이후 1271년에 몽골군과 용감히 싸워 물리쳤다 해서 비로소 수원이라 불리며 도호부가 되었다.
그런데 사실 고을 사람들이 몽골군을 물리친 곳은 안산의 대부도였다. 당시는 안산이 수원의 속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수원은 꽤나 떨어진 섬사람들의 분전 덕에 일급 도시로 승격했다. 약 100년 뒤인 1362년에는 홍건적에 맞서 싸워보지도 않고 날름 항복하여 근처 고을들이 도미노 쓰러지듯 점령당하게 만들었다. 당시 복주(안동)에 피란 가 있었던 공민왕은 이를 괘씸하게 여겨 개성으로 돌아온 뒤 안동과 안성(작은 고을임에도 항복하지 않고 열심히 싸웠다)을 승격시키는 한편 수원은 군으로 강등했다. 얼마 뒤 다시 수원부가 되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조정에 뇌물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군사적 중요성은 정조가 수원 화성을 쌓는 명목으로 작용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역으로, 군사적 중요 거점으로, 그리고 새로운 수도의 후보지로 수원을 중요한 도시라 여겼다. 수원은 본래 읍성을 갖추고 있었고, 권율의 독성산성전투 이후 새로 증축해 부성을 쌓기도 했다. 하지만 정조 시기에는 대부분 무너져 있었다. 따라서 새로 견고한 성곽을 쌓아서 수도 방위에 만전을 기한다는 명분은 충분했다. 이에 앞서 정조는 수원을 성도(聖都)로 만들기 위한 첫 수를 성(城)이 아니라 묘(墓)로 둔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역을 수원으로 정한 것이다.
1789년, 정조가 재위한 지 13년이나 지나 둔 첫 수였다. 그럼에도 잔뜩 신중을 기해 주자의 발언에다 천 년 전의 도선이 남겼다는 남겼다는 평가까지 동원해 수원으로 정하자고 신하들에게 읍소하다 시피 말하고 있다. 정조가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첫 수를 둔 까닭은 공식적으로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처벌한 죄인이며, 그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공한 아들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높이는 일은 유교적으로 마땅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뜻이자 전대 왕의 뜻을 뒤엎는 일은 반대로 마땅치 않았기에, 정조는 온갖 머리를 굴리며 조심조심 차근차근 사도세자를 복권해 왔다.
일단 즉위한 다음 해(1777년)에 사도세자가 묻힌 묘소 이름을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올리고, 위패를 모신 수은묘(垂恩墓)는 경모궁(景慕宮)으로 올렸다. 묘(墓)나 묘(廟)는 어려서 정식 이름도 없을 때 죽었거나 상서롭지 못하게 죽은 왕자의 무덤 혹은 사당에 붙이는 최하급 별칭이었기에 일단 왕의 아버지로서 최소한의 존승을 한 것이다.
지난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