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여울 작가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살롱드뮤즈> 연재.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데미안 프로젝트>, <문학이 필요한 시간>,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끝까지 쓰는 용기>, <공부할 권리>,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빈센트 나의 빈센트> 등을 썼다.
헤르만 헤세는 마흔이 넘어 그림을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말렸다고 한다. 이미 작가로 성공했는데 굳이 새로운 걸 힘들게 시작할 필요가 있냐고. 게다가 마흔이 넘었는데 전혀 새로운 걸 배운다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아느냐고. 그러나 헤세는 마냥 즐거웠다. 그림 그리기가 정말 재미있었던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 모든 걱정과 슬픔이 날아가 버리는 듯한 행복을 체험한 것이다. 헤세는 수채화를 그릴 때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리는 사람’이라는 상상을 하며, ‘타인의 평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림 그리기가 우울증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사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전쟁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독일에서의 출판이 어려워지게 되자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헤르만 헤세는 스위스에서 심리학 상담을 받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며 ‘화가 헤르만 헤세’로서의 삶을 시작했던 것이다. 나이 들수록 새로운 것을 배움으로써 영혼의 젊음을 유지했기에 헤르만 헤세는 80세가 넘은 나이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다. 굳이 전문가에게 배우지 않아도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하루하루 세상을 새롭게 배우는 것이 아니었을까.
배움은 학교나 학원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인생의 새로움을 추구하며 과거의 낡은 습관을 버리는 용기야말로 배움의 핵심이다. 배움의 길 위에는 탄탄대로만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지?’라는 의심을 극복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왜 저렇게 잘 하나?’하는 질투심도 극복해야 한다. 정말 다행인 것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많이 하면 그런 의심과 질투가 많이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나는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미적 감각이 없다’는 생각으로 사진 배우는 것을 꺼렸지만, 사실은 나도 나만의 이야기를 담은 사진을 찍고 싶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배움의 동기는 ‘내가 재능이 있다’는 믿음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잘 ‘못하는’ 일에 도전해 보고 싶어졌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진이 아니라 그저 투명하게 내 마음을 담은 사진을 찍어보고 싶었다. 사진을 배우기 위해 자기소개서도 새로 써보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 이름과 직업을 소개하기도 하는 과정 자체가 쑥스럽지만 재미있었다. 그냥 처음이라는 것이
좋았다. 뭔가를 뛰어나게 잘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시작해 보고, 실험해 보고 싶고, 내가 닿을 수 있는 곳까지 가보고 싶었다.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이렇게 성취감을 생각하지 않은 채, 무언가를 간절히 원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노력했던 모든 일들에 대해 나는 지나친 성취감을 요구했기에, 한 번도 ‘말갛게, 그냥 좋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피아노도, 첼로도, 나에게는 성취감보다는 좌절감을 더 많이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는 일은 나에게 아무런 성취감을 요구하지 않았다. 내가 사진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사진을 찍어보고, 사람들과 내 사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내가 존경하는 사진작가님으로부터 약간의 조언만 얻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욕심 없이 뭔가를 시작하는 일 자체가 처음이었다. 막상 시작해 보니 물리적으로 힘든 것도 있었다. 나는 대상에게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는데, 내가 새로 장만한 카메라는 줌 기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용기를 내는 만큼, 내가 부지런히 뛰어갈 수 있을 만큼만, 대상은 내게 다가와 주었다.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찍고 싶을 때도, 아이들의 엄청난 달리기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좌절하기도 했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관람하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을 찍을 때는 그 사람의 집중과 몰두를 방해할까 두려워 차마 셔터를 누르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수많은 좌절의 순간들을 겪고 나니, 비로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거리’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나를 경계하지 않는 사람들, 내 카메라가 워낙 작고 존재감이 없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 내가 사진을 찍든 말든 전혀 상관없이 자기만의 일과 놀이에 미친 듯이 몰두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내가 충분히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내가 포착하고 싶은 대상과 나 사이의 적절한 거리감을 조금씩 배우는 동안, 어느새 나는 사진을 향한 나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냥 조금만 배워보려고 했는데, 일하는 시간,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어 사진에 몰두하는 나를 발견했다. 게다가 나의 사진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대학원 시절 글쓰기에 대해 합평회를 할 때는 그냥 무조건 일방적으로 혼나기만 할 때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제 성인들을 위한 취미 사진반에서는 그런 권위적인 분위기가 전혀 없어서 황홀했다. 권위가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토론이 가능해진 느낌이었다. 반드시 도달해야 할 목표도 없고, 반드시 잘 보여야 할 사람도 없는 그런 해맑은 자유 속에서 비로소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을 잘 못하는지도 알았고, 무엇을 조금은 잘할 수 있는지도 알았고, 그러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이 순간, 날것의 꾸밈 없는 기쁨을 즐기는 법도 알게 되었다.나에게는 사진을 더 잘 찍는 ‘기술’이 아니라 좋은 사진을 ‘알아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사진작가님의 조언을 들으면서 그동안 찍은 사진들에 대한 의견을 듣고, ‘더 나은 사진’을 고르는 일 자체가 커다란 배움의 과정이었다.
창조성이 고갈된다는 생각이 들 때, 이제 내 머리에서 더 새로운 것은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날 때,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는 일에 도전해 보자. 우쿨렐레처럼 가볍고 휴대하기 좋은 악기를 배우는 것도 좋고, 어른들을 위한 피아노 교습처럼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다시 돌아가 보는 배움의 시간도 좋다. 빵을 굽거나 커피를 내리는 것 같은 향기로운 배움도 좋다. 무엇이든 이전에 내가 열심히 해본 적 없는 것들에 도전해 볼 때, 우리의 마음도 몸도 새롭게 움직이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우리는 영혼의 젊음을 되찾고, 다시 새로운 내일을 향해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샘솟는 순간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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