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내가 가진 모든 언어가 사라져버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당황하고 불안하고 우울할 때, 내가 배우고 읽고 써온 모든 언어가 낯설어질 때가 있다. 다행히 나에게는 그럴 때 뜬금없이 전화해도 마치 엄청나게 중요한 전화인 것처럼 받아주는 선배가 있다. 얼마 전에는 그야말로 뜬금없이 전화해서 선배의 안부를 묻는 척하면서 나의 불평을 늘어놓았다. “시간을 많이 쏟아 부으면 글이 잘 써질 줄 알았는데요, 아무리 붙들고 있어도 글이 잘 써지지 않아요.” 선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렇게 받아쳤다. “너는 잘 안 써지는 정도지? 나는 이제 전혀, 전혀 안 써져.”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너털웃음이 나왔다. 선배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자기를 형편없이 망가뜨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아무리 씩씩하고 강인한 작가라도, 글이 전혀 안 써지는 상황이 즐거울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선배는 그 어려운 상황을 시트콤으로 만들어버리고, ‘넌 좀 쉬어도 된다’고, ‘넌 좀 놀아도 된다’고 위로해준다. 나는 깔깔 웃으며 비로소 ‘나’로 돌아왔다. 작가들의 무서운 적,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 글이 전혀 써지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은 이렇게 치유되기도 한다. 자기가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여유, 거기서 진정한 유머는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나를 ‘유머의 세계’로 인도하는 그림도 있다. 미술작품으로 사람을 웃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그림이 바로 <스케이트 타는 목사님>이다. 그림에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 <스케이트 타는 목사님>을 알게 된 그날 이후로 나는 자꾸 ‘유머러스한 그림’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신의 코 바로 밑에서 ‘미소’라는 이름의 행복을 찾을 수 있으면서 왜 그토록 애타게 ‘또 다른 행복’을 찾아 다니는 것일까까? 스케이트 타는 목사님은 미끌미끌한 빙판 위에서 전혀 힘들지 않은 듯, 어쩌면 자신이 스케이트를 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는 듯한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놀라운 평온함, 목사님의 얼굴에서 은근히 배어 나오는 장난기, 그리고 그가 입은 엄격한 성직자의 복장이 흥미로운 불균형을 이룬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몸소 겪어본 사람은 이 그림의 소중한 정서를 더욱 간절히 느끼게 된다. 그의 경이로운 스케이팅 장면을 보면 기나긴 겨울이 꼭 춥고 외롭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우아하면서도 확신이 어린 그의 몸놀림은 그림 전체에 절제된 활기를 부여한다. 스케이트를 전혀 못 타는 나 같은 사람도 이 그림을 보면 왠지 스케이트를 아주 잘 탈 수 있을 것 같은 유쾌한 기분에 감염된다. 스코틀랜드의 혹독한 겨울을 묘사하는 저 배경화면 속의 황량한 산들과 대조되는 그의 멋진 스케이팅은, 황량한 벌판 위에서도 아름다운 몸놀림으로 이 겨울의 우울증을 날려버리는 인간의 작지만 위대한 승리를 보여준다. 배경은 황량하기 그지없는데 그는 마치 아늑한 배를 타고 저절로 떠 있는 듯 유쾌하게 얼음 위를 질주한다.
그림 속의 인물은 지역사회의 존경을 잔뜩 받고 있는 목사님이다. 그 이름도 찬란한 로버트 워커 ‘경(The Reverend)’이 너무나도 작고 앙증맞은 발로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모습은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웃지도 않고 찡그리지도 않은 채 ‘이게 뭐 대수라고’ 하는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스케이트를 타는 목사님의 모습에는 삶의 무거움과 온갖 골치 아픈 업무들을 이 순간만은 완전히 잊어버린 자의 여유와 내공이 묻어 있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마침 살을 에는 추위와 휘몰아치는 바람에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였기에, 이 작품은 더욱 따뜻한 ‘영혼의 난로’처럼 느껴졌다. 나는 온몸으로 이 그림이 전해주는 웃음에 치유의 힘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가 평소 근엄한 표정으로 신도들에게 설교하는 모습도, 무려 다섯 명의 아이를 둔 아버지라는 점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그림이 자아내는 유머의 본질은 바로 그 모순과 불균형에 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랍도록 단정하고 세련되게 정제된 그의 복장이 보인다. 여기저기 다이내믹한 소용돌이가 그려진 빙판은 그가 힘차게 질주한 스케이팅의 흔적을 보여준다. 근엄함과 경건함의 상징인 목사님이 애들이나 타는 스케이트를 이토록 우아하고 귀염성 있게 즐기고 있다는 ‘언밸런스’한 상황이 관객을 웃음짓게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감정의 해방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시간, 나이와 성별마저 잊고 ‘순간의 산뜻한 희열’ 속으로 정직하게 몸을 던지는 건강한 오락의 시간 말이다.
유머라는 것이 꼭 엄청난 화술과 우스꽝스러운 행동으로만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소한 장난을 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미소지을 수 있다. 진정한 웃음의 비밀은 ‘유머 자체의 밀도’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웃을 수 있는가’라는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기대했다가 뜻밖에도 깨알 같은 유머 코드를 발견할 때. 우리의 긴장은 이완되고, 삶을 바라보는 눈은 느긋하게 풀어진다. 치유의 본질은 이완이다. 예컨대 카프카 박물관에서 만난 오줌싸개 동상이 그런 것이었다. 무겁고 진지한 카프카의 작품들을 생각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카프카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나보다도 먼저 웃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이 웃고 있는 것은 카프카 박물관 앞에 서 있는 오줌싸개 동상 때문이었다. 우리는 오줌싸개 '소년’의 동상에는 익숙해져 있지만,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서로 마주 보며 그야말로 ‘엉덩이를 흔들흔들’ 춤을 추며 ‘오줌싸기의 축제’를 벌이는 장면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공짜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아주 가까운 길이 ‘거리의 예술’ 속에 있다는 사실이 참 좋았다. 오줌싸개 동상의 흥겨운 춤사위 덕분에 카프카의 슬픔도, 카프카의 분노도 조금은 수그러드는 것 같아 가슴이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예전에는 피터 브뤼헬의 그림이 ‘우습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지금은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미소가 절로 나온다. 그의 유머 코드를 나는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나 보다. 피터 브뤼헬 작 <농가의 결혼식>. 결혼식이라는데 정작 신랑 신부는 주인공이 아니다. 신부는 취했는지 피곤한지 몽롱한 상태로 보이고, 결혼식을 진짜로 즐기고 있는 사람들은 ‘별 상관 없는 손님들’이다. 사람들은 각자 흥에 겨워 신나게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리고, 춤추고, ‘작업’을 걸기도 한다.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흥에 겹다. 인생이란 원래 이렇지 않은가? 잔칫집에서 진짜 주인공은 신랑이나 신부가 아니라 가장 많이 퍼마신 객이라는 아이러니. 나도 왠지 저 잔칫집에 가본 느낌이 든다. 타고난 공감의 능력을 한층 끌어올리는 이 작품은 너무나 ‘토속적’이어서 각자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한다. 유럽의 잔칫집도 그랬구나, 우리네 잔칫집도 그렇던데 그림 속 인물들과 술 한잔 기울이고 싶게 하는 그런 그림이다.
보자마자 폭소를 터뜨리게 되는 그림도 있다. 프란스 할스의 <행복한 술꾼>(1630년)이다. 그림에서 술 냄새가 확 끼쳐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사람 때문에 화면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 분명히 정지된
그림인데 비틀비틀 동영상을 찍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핸드 헬드 카메라에서 초점이 흔들려버린 그 느낌이 좋았다. 가끔 그 술 취한 아저씨의 그림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오곤 했다. 그림만 보고 있어도 멀쩡했던 내가 점점 취기가 오르는 느낌이 좋았다. 프란스 할스의 다른 그림들도 이렇게 ‘취한 사람’이 많이 나오는데, 그는 가벼운 도취와 나른한 취기 속에서 인간의 숙명적인 본질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오른쪽 손으로는 손사래를 치면서 왼쪽으로는 화이트와인이 반쯤 담긴 잔을 들고 있는 그의 표정은 도취와 환희 그 자체다. 한 손에 술잔을 들고 불쾌한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만연한 술꾼의 모습이 익살맞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걱정도, 과거에 대한 어떤 미련도 없어 보이는 그의 해맑은 도취는 보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 오르게 만든다. 앞에 있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취중 대화를 하는 듯한 ‘행복한 주정뱅이’의 모습은 짧은 시간 안에 모델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자연스런 모습을 단기간에 포착해야 했을 화가의 민첩함과 융통성을 상상하게 만든다. 술 취한 사람들의 그림이 유난히 많은 프란스 할스의 작품 세계는 특별한 스토리보다 ‘순간에 휘발되는 미소’에 온 힘을 집중한다. 프란스 할스는 우여곡절 많은 인생에서 ‘빛나는 시간’은 바로 이런 시간, ‘시시껄렁해 보이지만 아주 작은 미소로 세상이 잠시나마 환해지는’ 바로 그 시간 속에 있음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
웃음은 잠깐 ‘자기’라는 존재를 불현듯 놓아버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현실, 나의 책임이 무엇이고, 내 슬픔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 이 모든 것을 그 순간 잠깐 확 놓아버리는 것이다. 웃음은 자기를 잊음으로써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마력을 가졌다. 웃음이 가진 긍정적 외향성이다. 웃음으로 가득 찬 문학과 예술을 통해 나는 매번 깊은 슬픔과 우울의 늪으로부터 해방된다.
프란스 할스, <행복한 술꾼>, 1630년대
피터 브뤼헬, <농가의 결혼식>, 1568년
진정한 웃음의 비밀은 ‘유머 자체의 밀도’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웃을 수 있는가’라는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