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는 기다려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이 싫었다. 기다려야만 그토록 고대하던 여름방학이 오고, 기다려야만 내가 사랑하던 막내 삼촌이 우리집에 와주고, 기다려야만 손뜨개질로 만든 목도리가 완성되니까. 기다림은 지루함이나 인내심과 동의였으니까. 기다림을 참지 못하던 어린 시절에는 라면이 미처 다 익기도 전에 불을 껐다가 설익은 라면을 먹으며 울상을 짓기도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우리 막내 삼촌이 오지 않아서 펑펑 울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기다려야만 영글어가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기다림은 그저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삶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는 온갖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오랜 기다림의 결과물을 상상하는 설렘을 즐길 수도 있다는 것을.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오랜 기다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다림의 열매라는 것을.
할머니의 장독대는 기다림을 가르쳐준 첫 번째 선생님이었다. 동글동글 탱탱하고 싱그럽던 콩들이 장독대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숨을 쉬면 보드랍고 구수한 된장이 되고, 뿐만 아니라 마치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처럼 짭짤하면서도 상큼한 간장이 생기다니. 장독대를 보살피는 할머니의 정성이 오래오래 지속될수록, 장독대 속의 간장, 된장, 고추장, 장아찌는 향기로워지고 맛깔스러워졌다. 햇살 좋은 날이면 뚜껑을 열어 숨을 쉬게 하던 그 항아리들. 그 안에서 시간은 단순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변화시키고 깊게 만들고 완성시키는 연금술사였다.
우리는 무한 속도전의 세계에 살아간다. 클릭 한 번이면 세계 반대편의 소식이 도착하고, 손가락 하나로 원하는 물건을 주문하며, 기다림 없이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들은 여전히 기다림을 요구한다. 마치 자연의 법칙처럼, 어떤 것들은 시간이라는 재료 없이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 AI 시대에도 변함없는 기다림,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하고 접촉하고 인사하는 것이다. 사랑은 첫눈에 반하는 순간의 번개 같은 감정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사랑은 기다림 속에서 천천히 뿌리를 내린다. 처음 만난 날의 설렘은 분명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은 봄날의 벚꽃처럼 화려하지만 짧다. 진짜 사랑은 그 이후에 온다. 상대의 아침 얼굴을 보고, 화가 났을 때의 모습을 알고, 슬플 때 어떻게 위로받고 싶어 하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그 모든 시간들. 사랑은 한 번의 선택이 아니라, 매일의 기다림과 선택의 연속이다. 상대방의 변화를 기다리고, 함께 늙어가는 것을 기다리고, 서로의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것. 사랑은 기다림 속에서 더욱 강렬해진다. 연인을 기다리는 시간, 그 사람의 전화를 기다리는 시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시간. 그 모든 기다림이 사랑을 더 깊게 만든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오해가 풀리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첫인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시간도 필요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드러낸다. 시간은 진실의 아버지다.” 세네카의 이 말은 이해라는 것이 얼마나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즉각적인 판단을 내린다. 사람들은 첫인상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단편적인 정보로 상황을 해석한다. 하지만 진정한 이해는 그렇게 쉽게 오지 않는다. 마치 안개가 천천히 걷히듯, 이해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선명해진다. 어머니를 이해하는 데 나는 삼십 년이 걸렸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나이와 인종과 시대에 상관없이, 언제나 기다림이 필요한 것은 사계절의 흐름이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이룬다.” 노자의 이 말은 계절음식의 본질을 정확히 표현한다. 봄의 냉이, 여름의 수박, 가을의 밤, 겨울의 김장 김치. 이 음식들은 단순히 맛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의 결실이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기다린다. 비가 오기를, 햇살이 내리기를, 열매가 익기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없다면, 그 맛도 없다. 할머니는 매년 봄이면 산에 올라 냉이를 캤다. “냉이는 봄에만 먹어야 제맛이야”라고 하시며, 된장에 무쳐주시던 그 냉이의 쌉싸름한 맛. 그것은 단순한 맛이 아니라, 긴 겨울을 견디고 온 봄의 맛이었다. M.F.K. 피셔는 『음식에 관한 예술』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먹는다.” 음식 속에 담긴 시간의 흔적, 그 시간에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추억, 그 모든 것이 음식 속에 담긴 이야기보따리이기에. 그리고 그런 제철 음식을 먹기위해서는 반드시 기다림의 노력이 필요하기에.
진정한 우정 또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SNS 시대에 우리는 수백, 수천 명의 ‘친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진짜 친구는 몇 명이나 될까? 새벽 세 시에 전화해도 받아줄 친구,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아는 친구, 내 단점을 알면서도 곁에 있어 주는 친구. 그런 친구는 시간이 만든다.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하는 그 모든 시간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는 거야.” 여우는 어린 왕자와 친구가 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더 행복해질 거야. 네 시가 되면, 나는 벌써 들떠서 안절부절못할 거야. 그래서 나는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게 될 거야!”
시간이 흘러 이제는 진정한 벗이 된 여우와 어린 왕자. 그들이 헤어져야 하는 순간, 이제 그 기다림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너를 보기 위해서 기다렸던 그 모든 시간도 소중했지만, 이제 너를 볼 수 없는 시간이 와도, 너와 조금이라도 닮은 존재를 보면, 이를테면 어린 왕자의 금발머리를 닮은 황금빛 밀밭만을 봐도, 나는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을. 너와의 만남을 그리워하는 그 모든 시간조차 기다림의 일종임을. 기다림은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지 못하는 시간에도 그가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것을. 기다림은 단조롭고 무미건조했던 모든 시간을 의미있고 다채로운 시간의 발자국으로 변신하게 만든다. 어린 왕자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이 지나고나서야 여우는 깨달았을 것이다.
시간이 빚어내는 아름다움 중 또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은 바로 예술을 위한 기다림이다.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도 작곡을 계속했다. 그의 교향곡 9번은 몇 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는 데 무려 4년이 걸렸다. 목과 등이 아파 제대로 서지도 못했지만, 그는 매일 조금씩 그림을 그렸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문장을 쓰기 위해 39번을 고쳤다고 한다. 플로베르는 하루에 단 한 페이지를 쓰기 위해 종일 고민했다.
AI 시대가 와도, 인간이 화성에 가서 살아가는 시간이 오더라도, 변치 않는 기다림은 이렇게나 많다. 그 어떤 기다림보다 아픈 시간은 바로 상실과 치유의 시간일 것이다. 상실의 아픔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안다. 처음에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고, 다시는 웃을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상처를 어루만진다. 어느 날 문득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또 어느 날은 하루 종일 그 사람을 떠올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상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상처는 흉터가 되고, 그 흉터는 우리가 살아온 증거가 된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슬픔의 다섯 단계를 이야기했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이 단계들을 거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서두를 수 없다.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식으로 슬픔을 통과해야 한다. 몸의 상처도 마찬가지다. 뼈가 부러지면, 깁스하고 기다려야 한다. 세포들이 천천히 재생되고, 뼈가 다시 붙는 그 과정을 기다려야 한다. 마음의 상처도 같다. 상처가 낫기를 기다리는 그 오랜 과정 동안, 우리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도 하고, 그동안의 소중한 인연의 고마움을 새롭게 배우면서, 한 발 한 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당신을 가장 설레게 하는 기다림은 무엇인지, 2025년을 마무리하는 다이어리에 사각사각 소리를 내어 적어보자. 당신의 미래를 축복하는 수많은 기다림이 당신의 인생을 축복하기를. 가디림이 없기를 바라는 인생은 더욱 지루하고 무미건조하다. 아기가 태어나는 기다림, 사랑이 시작되는 기다림, 작품이 탄생하는 기다림,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수많은 꿈이 이루어지는 기다림까지. 그 모든 기다림이 우리를 어제보다 더 성숙하고 눈부신 존재로 만들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