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여울 작가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살롱드뮤즈> 연재.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데미안 프로젝트>, <문학이 필요한 시간>,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끝까지 쓰는 용기>, <공부할 권리>,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빈센트 나의 빈센트> 등을 썼다.
마지막으로 설렘을 느낀 것은 언제인가요.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예전에는 ‘바로 오늘이요’라고 대답할 수가 있었는데, 이제는 ‘아, 마지막 설렘이라니, 그게 언제였던가’라고 한참 기억을 되짚어 보게 됩니다. 예전보다 ‘이번 설렘에서 다음 설렘으로 가는 시간’이 길어진 셈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매일 설렘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신기했던 어린 시절에는 ‘저 사람은 누굴까, 오늘은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같은 아주 단순한 질문만으로 쉽게 설렘을 느끼곤 했습니다. 20대 시절에는 새로운 인연이 시작될 때마다 설렘을 느꼈습니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모든 새로운 만남이 설렘과 떨림, 싱그러운 봄햇살 같은 반가움으로 다가왔습니다.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길 것 같은 막연한 설렘은 청춘의 눈부신 축복이었습니다. 이제는 설렘이라는 단어 자체가 조금은 낯설게 다가옵니다. ‘마지막 설렘’ 자체가 잘 기억나지 않게 되어버렸어요. 설렘은 이렇게 마음의 노화를 측정하는 가장 선명한 기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이 이미 늙어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던 순간 <다시, 책으로>라는 멋진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을 읽다 보니 ‘나는 항상 설렘을 느끼면서도, 설렘을 설렘이라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매일 책을 읽는 사람, 매일 요즘 나오는 신간은 어떤 것이 있는지 찾아보는 사람, 책을 통해 삶에 대한 뜨거운 질문을 하는 사람. 그런 인생을 꿈꾸는 제 삶이야말로 설렘의 연속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턴가 설렘을 너무 거창히 생각하게 되어버렸기에, 매일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호기심과 감동에서 설렘을 느끼고 있는 나의 삶을 너무 ‘평범하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더 자주 설렘을 느낄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바로 ‘매일 새로운 책을 읽거나, 생각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저에게 책을 읽는 설렘을 가르쳐 준 뜻밖의 책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습니다. 어린 시절 주인공은 잠들기 전 엄마의 굿나잇 키스를 받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것은 소년에게 힘겨웠던 하루하루를 마감하며 ‘이것만 있다면’ 오늘 하루의 스트레스를 모두 다 날려버리고, 다가오는 새로운 하루를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신비의 묘약 같은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년은 마치 구원의 샘물을 기다리듯, 단 한 번뿐인 인생의 기적을 기다리듯, 그날 저녁 ‘엄마의 굿나잇 키스’ 한 번을 기다립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런 소년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엄마에게 그런 다정한 키스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힘들 땐 엄마가 간절히 필요한 어린 소녀이긴 했지만, ‘엄마의 입맞춤’을 그렇게까지 갈망하는 소년이 조금은 유치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문화의 차이이기도 하지요. 우리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잠들기 전 아이에게 키스를 해주는 부모가 별로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기 시작하니, 비로소 이 아이의 간절함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엄하게 키우려고 하고, 엄마는 그런 남편의 눈치를 보는 분위기를 이해한 것입니다. 아이가 너무 병약하고 감정이 극도로 예민한 탓에 더더욱 아이를 강하게 키우고 싶어하는 아빠의 마음. 그리고 그런 남편을 이해하면서도 아이가 혹시나 서운해할까 조바심을 내는 엄마의 마음. 그리고 그 사이에서 제발 힘든 오늘 하루를 위로해주는 엄마의 굿나잇 키스만을 기다리는 어린 소년의 간절한 마음. 그 세 마음이 만났을 때 비로소 굿나잇 키스의 ‘미칠 듯한 설렘’이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너무 많은 어른이 모여 아이가 관심을 받을 수 없었던 어느 날, 불안과 외로움 속에 엄마의 키스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 힘겨운 밤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위로는 엄마의 따스하고 달콤한 입맞춤이었기에.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고 잠들려던 순간, 아빠는 아이에게 엄마를 보내줍니다. 마치 가장 간절한 기도는 마지막에 이루어진다는 듯이. 드디어 엄마의 포근하고 달콤한 입맞춤이 이루어지자, 소년은 세상을 한꺼번에 다 가진 듯 행복을 느낍니다. 바로 그런 것이 ‘설렘’의 원초적인 장면이었던 것입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닌, 그저 내가 좋은 것. 세상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하는 트로피, 당첨이나 상금이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엄마의 굿나이 키스만이 이 소년의 간절한 설렘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최고의 무기는 바로 설렘이 아닐까요.
매일 설렘을 느낄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가슴 설레는 일’을 하면서, 그리고 가슴 설레는 만남을 지속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창한 꿈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어린 시절 포기했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면서 느끼는 설렘은, 설렘 한 조각 없이 그저 엄마 손에 이끌려 피아노학원에 갔던 일곱 살 때의 기분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저는 어른이 되어 피아노를 다시 연주하면서 ‘잃어버린 설렘의 시간’을 찾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체르니 30번, 40번 같은 ‘진도’가 중요했지만, 지금은 ‘오늘 내가 좋아하는 곡을 연주할 수 있다는 기쁨’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박사과정이 끝나고 나서도 ‘심리학’을 새로운 ‘삶의 전공’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시간을 ‘인생 제2막의 설렘’으로 기억합니다. 그 어떤 윗사람에 대한 압박감이나 잘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지 않고, ‘그저 내가 사랑해서 선택한 공부’에 대한 싱그러운 설렘이 나로 하여금 ‘인생 제2막’을 시작하는 기쁨을 느끼게 해준 것입니다. 인생 제2막을 향한 설렘, 그것은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고, 나는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가’를 향한 탐색을 충분히 거친 뒤 마침내 ‘내가 가장 좋아하면서도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을 때의 환희입니다. 저는 40대 이전 인생 제1막에서는 ‘문학’을 선택했고, 인생 제2막에서는 ‘심리학’을 선택하면서 ‘문학과 심리학의 하모니’를 통해 인생의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와 <데미안 프로젝트>는 ‘나의 나다움’을 매일 새롭게 갱신하고자 애썼던 내 오랜 설렘의 기록입니다. 사람을 향한 사랑은 어느 한쪽의 마음이 식어버리면 끝나지만, 내가 진짜 사랑하는 일에 대한 사랑은 삶이 계속되는 한 끝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 설렘은 ‘세상 그 자체에 대한 설렘’입니다. 얼마 전에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린 시절 동화책으로만 읽었고, 두꺼운 원작 장편소설은 어른이 되어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일 때문에 읽게 되었는데, 무려 8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좋아하는 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1850년에 나온 책이니 오늘날의 시선에서 보면 좀 지루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대강의 줄거리도 알고 있었기에 800페이지 넘는 분량을 다 읽을 동안 과연 ‘책을 읽는 재미’를 계속 느낄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어린 시절의 기억은 매우 희미한 것이었고, 완전히 ‘새롭고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어린 시절 짧게 축약된 동화 버전으로는 잘 느낄 수 없었던 이야기의 디테일, 인물들의 섬세한 묘사에 더욱 커다란 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오히려 더욱 뛰어난 판단을 할 때는 더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노예라는 이유로, 마음대로 톰을 소유하고, 팔아넘기고, 매질하고, 착취하는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톰의 따스한 마음과 눈부신 용기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봅니다.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준 톰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톰이 나쁜 주인에게 팔려가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 하는 소녀 에바의 결정은 놀랍습니다. 에바의 아버지는 에바가 톰을 자신의 옆에 두려 하자 왜 그 ‘노예’를 ‘갖고 싶은지’ 물어봅니다. 장난감 삼으려고, 목마로 삼으려고, 아니면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하냐고. 그러자 에바에게서 놀라운 대답이 돌아옵니다. “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노예를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어떻게든 톰을 ‘이용’하려고만 하는데, 이 해맑은 소녀 에바는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훨씬 나은 순간들은 얼마나 많은지 이 장면을 보고 오랜만에 눈부신 설렘을 느꼈습니다. 이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 어린 소녀는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이런 궁금증을 느끼며 8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어 가장 많이 하게 되는 것은 ‘사건이 일어나기도 전에 짐작하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짐작하고, 추측하고, 계산하고, 비교하면서 우리는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설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나는 이렇게 매일매일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내가 모르던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사실은 모르는 것들로 가득했음을 깨닫습니다.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용기, 내가 모자랐음을 성찰하는 용기를 통해 조금씩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렘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설렘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삶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호기심, 지금 주어진 이 시간과 이 장소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 한. 설렘은 매일매일 새롭게 우리의 심장을 요동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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