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북도 도청소재지이자 전북 제1의 도시인 전주는 면적이 205제곱킬로미터, 인구는 65만 명을 조금 넘는다. 면적으로는 대한민국 도시 중 66위, 인구로는 17위로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많은 편이다.
전주 도심에는 옛 유적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는 전주 객사이고, 현판을 보면 호방한 필적으로 풍패지관(豊沛之館)
이라 적혀있다. 풍패란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의 고향을 지칭하여 풍패지향은 건국자의 고향을 뜻하는 관용어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풍패지향이 바로 전주라는 뜻이다. 호방한 필적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1606년에 와서 썼다고 전한다. 왜 그는 굳이 한양에서도 꽤 남쪽으로 내려와서 이 현판을 썼을까?
앞서 익산 출신의 문신 송영구가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는데, 그곳에서 과거 시험에 매번 낙방해 풀이 죽어 있던 주지번을 만나 그에게 과거시험 노하우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 결과 거뜬히 합격한 주지번은 그 은혜를 잊지 못해 사신으로 왔을 때 익산을 찾아 송영구를 만나보았고, 내친김에 전주에도 들러 풍패지관이라는 현판을 썼다는 것이다.
조선 왕실이 소중하게 여긴 도시가 한양 말고, 몇 군데 더 있다. 이성계의 고조부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함흥(조선 왕실에서는 이쪽을 풍패지향이라고 부르는 때가 많았다), 원산, 그리고 전주다. 전주는 대대로 이성계의 조상들이 이곳에 뿌리내리고 호족 생활을 했던 곳이다.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고 철마다 제사를 지내온 종묘 다음으로 왕실에게 귀중한 공간인 경기전도 이곳에 세워졌다. 그렇다면 조선의 풍패지향이 되기 전의 전주는 어떤 역사를 거쳐왔을까?
큰 바람(大風)이 일어났네. 구름은 높이 떠올랐다네.
온 세상에 위엄 크게 떨쳤네. 이제 고향에 돌아왔네.
어디서 또 용맹한 무사를 얻을까. 사방을 지키도록 맡길까?
이 「대풍가」는 한고조 유방이 기원전 196년에 군벌들의 반란을 진압한 다음 고향인 풍패에 들러 잔치를 베풀고 불렀다는 노래다. 한마디로 천하를 평정한 제왕의 노래로, 이성계에게 이미 고려는 자신의 나라였다. 이 노래를 듣고 기가 막혔던 이성계의 친구이자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는 홀로 남고산성에 올라 통곡하며 우국시를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몽주의 애간장이 끊어지든 말든, 전주 사람들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동안 당한 설움이 씻은 듯 가시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 승리의 잔치가 벌어진 현장이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오목대라고 한다. 대한제국 고종은 1900년 이곳을 방문해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를 친필로 써서 세워 이날의 잔치를 기념했다.
조선 태조가 된 이성계도 그날의 연회를 잊지 않았다. 그날 술잔을 나눈 전주 유지들의 자제들을 뽑아 올려 숙위를 맡겼으며, 그들은 전주 양반들의 묘목이 된다. 전주 자체는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되었고, 여전히 전라도의 주요 도시로 남는 한편 좌, 우로 분리된 전라우도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1404년에는 건국공신 최담이 한벽당을 세우고, 1410년에는 경기전이 세워졌으며 1439에는 실록각이, 1578년에는 예종대왕태실이 설치되는 등 조선 전기에 지금 전주에 남아 있는 문화재가 대부분 생겨났다.
조선 후기의 전주는 상업 도시로 이름을 날렸다. 후기에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호남 지역의 재화가 모이고 시장을 통해 유통되는 중심지로 전주가 떠오른 덕분이다. 그런데 이름난 선비들이 전주를 흰눈으로 보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상업이 발달한 곳은 으레 여러 사람이 뒤섞이면서 소란스럽고 흥청대기 마련이다. 그런데 선비들의 눈에는 그런 모습보다 가난하지만 맑은, 안동같은 선비의 고장이 좋아 보였던 모양이다. 조선 말기로 향해 가던 18세기에서 19세기 무렵, 한편으로 이 땅에서는 새로운 향토요리가 나왔다. 비빔밥은 전주성 내에서 왕실과 연관이 있는 양반집들이 궁중의 골동반(骨董飯)을 흉내 내어 만든 듯하고, 콩나물국밥은 전주성을 드나드는 장사치들이 해장과 끼니를 위해 만든 듯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신흥종교가 나왔다. 전주 모악산은 예부터 특이한 정기가 서린 곳으로 풍수가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까지 계룡산보다도 많은 신흥종교를 낳았는데, 오늘날에도 세력이 대단한 증산교와 그 계통인 보천교, 태을교 등 약 40개의 교단이 모악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향토요리는 양반의 도시이면서 상업의 도시였던 조선 후기의 전주를 나타내며, 신흥종교는 조선 말기 백성의 불안과 고통에 응해 사람과 하늘의 이어짐과 해원상생, 천지개벽을 추구하는 생각과 마음이 결집된 것이다.
전북은 곡창지대였고, 그 곡식의 집산지인 전주는 일제강점기 때 심한 수탈을 겪었다. 문화재 피해도 심했다. 전주성이 헐리고, 사대문 중 풍남문만 남기고 모두 없어졌다. 한양을 향해 떠나는 관리가 망궐례를 행하던 곳인 공북루도, 관찰사가 관저이던 선화당도 사라졌다. 예종대왕태실도 도굴 및 훼손을 당하고, 원래의 위치에서 지금의 경기전 내부로 옮겨졌다. 이것이 오늘날의 전주 한옥마을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이라고도 한다. 우리 것을 마구 없애는 일제에 대한 반발로 한옥을 지키고, 새로 짓고 하다 보니 그리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전주는 문화를 디딤돌 삼아 발전해 나가고자 한다. 도시로 들어서는 톨게이트부터 전통 기와집 양식을 가져다 썼으며, 경기전, 풍남문, 오목대, 전동성당 등 주요 전통 유산이 비교적 가깝게 몰려 있고 그 바로 옆이 한옥마을임을 활용하여 나들이객과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천천히 걸어서 관광하며 놀고 먹으며 한나절을 보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런 느림의 미학 덕분에, 2010년에 국제슬로시티연맹의 도시형 국제슬로시티 공인을 받기도 했다.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비빔밥과 콩나물국밥, 한정식, 전주의 빵집이라고 할 수 있는 풍년제과 본점과 지점 등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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