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주는 충청남도의 도시다. 면적은 864제곱킬로미터. 같은 충남의 천안보다 2배 좀 못 미칠 만큼 크지만 인구는 11만 명 남짓으로 천안의 6분의 1 정도이나 그나마도 점점 줄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어느 도시 못지않은 역사의 영광과 한을 간직하고 있다.
“옛날 옛적에, 산에 약초를 캐러 간 젊은이가 산속에서 여인을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젊은이는 여인의 뒤를 밟았다가 그 여인이 곰으로 변해 사슴을 때려잡는 장면을 보게 된다. 자신이 곰과 결혼했음을 깨닫고 도망치던 젊은이는 뒤쫓아 오는 곰에게 잡히기 직전, 금강 변에 이르러 물에 뛰어들었다. 곰도 물에 뛰어들었으나 헤엄치지 못해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 살마들이 그곳을 고마나루(곰나루)라 불렀다.”
유몽인의 『어우야담』 등에 전해지는 ‘고마나루 전설’이다.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흑백 텔레비전에 나오던 「전설의 고향」으로 처음 접했다.
젊은이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곰 처녀와 부부가 되었다. 젊은이는 그녀를 사랑했으나 인간 세상이 그리웠고, 처녀는 그를 보내주지 않았는데, 어느 날 처녀가 병이 들자 그동안 미안했다며, ‘내가 죽으면 무덤을 만들어줘, 그리고 나서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젊은이는 눈물을 흘리며 ‘가기는 어딜 가겠어? 조금만 기다려, 당신을 살릴 약초를 캐 올게’ 하고 동굴을 나갔다. 그러나 멀리 자신이 떠나온 마을이 보이자, 그만 처녀를 깡그리 잊고 마을을 향해 달려 내려갔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나선 처녀는 그 모습을 보고 원한이 복받쳐 아픈 몸을 불사하고 뒤쫓았다. 젊은이는 간발의 차이로 강가에 닿아 배를 타고 떠나버렸다. 처녀는 그를 바라보며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곰으로 변하더니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전설이 으레 그렇듯, 이야기는 조금씩 다르다. 자결할 때 젊은이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까지 함께 빠트려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려 말에는 이존오가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당시 최고 비선 실세인 신돈과 대립각을 세웠던 그는 거듭 신돈을 탄핵해도 역풍만 맞고, 간신히 사형을 면한 채 방면되자 실의에 빠져 공주 석탄(石灘)가에 집 짓고 살다가 1371년에 세상을 떠났다. 죽기 얼마 전 사경을 헤매다 문득 정신이 드니 옆에 있던 사람에게 ‘신돈이 아직 건재하냐?’라고 물었고, 그렇다는 말에 탄식하면서 ‘신돈이 망하는 꼴을 보고 죽어야 하는데!’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가 한을 품고 죽은 뒤 석 달만에 신돈이 실각했고, 이존오는 뒤늦게 복권됐다.
조선 전기의 대문장가인 서거정은 공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자연히 공주를 주제로 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 그가 현판 글씨를 쓰고 기(記)를 지어 헌정한 취원루는 공주 목사관아 부근(공주시 중앙공원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취원루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사라졌다. 공주에 아직 남아 있는 오래된 사찰로는 마곡사와 갑사를 으뜸으로 친다.
계룡산 자락에 있는 갑사는 3세기 무렵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는데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하는 갑사부도 등의 유물과 남매탑 전설로 유명하다. 갑사와 계룡산의 명찰인 동학사 사이를 잇는 고갯길에 서 있는 2개의 탑은 불타버린 청량사 터에 남아 있다. (중략)
이 두 사찰에는 공교롭게도 항일운동과 관련되어 머물다 간 사람들의 흔적도 있다. 먼저 갑사는 기허당 영규(靈圭)대사가 도를 닦던 곳인데, 그는 1592년에 임진왜란 최초의 승병을 일으키고 금산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또 한 사람은 백범 김구다. 그는 1896년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살해하고, 한때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명에 따라 감형된 뒤 1898년에 탈옥했다. 그리고 몸을 숨긴 곳이 바로 공주 마곡사였다. 그는 머리를 깎고, 원종(圓宗)이라는 법명까지 받고는 1년 동안 승려로 살았다. 비록 아직 20대 초로 혈기왕성하던 그로서는 산사 생활에 오래 적응하지 못했으나 50년 뒤에 전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그는 마곡사를 다시 찾았다. 그리고 자신이 지내던 집 앞에 향나무를 심었다. 오늘날 그 집에는 백범당이라는 현판과 함께 김구의 사진과 글이 전시되어 있고, 그가 심었다는 향나무는 지붕보다 높게 푸르게 자라나 있다.
김구가 공주의 품에 숨어들기 약 4년 전, 1894년 말에는 공주 땅에서 비극이 있었다. 바로 우금치전투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 2만 명은 이곳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다. 아니, 싸움이라기보다 무참한 학살이었다. 지금 우금치로 가보면 제법 가파른 고개가 눈에 들어온다. 동학군은 고개 아래에서 위로 달려 올라갔고, 일본군과 관군은 고개 위에서 그들에게 기관총을 쉴새없이 발사했다. 농민들은 몇 차례에 걸쳐 고지 탈취를 시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6·25 전쟁 이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근대 전투로서 가장 처절하고 처참했던 나흘간의 전투는 동학군의 완전 궤멸과 동학농민운동의 종식으로 끝났다. 지금은 그런 피와 눈물, 울분, 젊아과 원한은 간 곳없고, 우금치 고개 정상에 그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만이 조용히 서 있다.
웅진 백제와 조선 후기의 번창에 비하면 공주는 지금 겨울잠을 자는 곰과도 같다. 하지만 잠재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먼저 교육도시로서의 힘이 있다. 1906년 한국명 우리암(禹利), 본명 프랭크 윌리엄스가 설립한 영명학교는 충청도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으로 100년을 넘게 이어오면서 유관순, 이수현 같은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숱한 인재를 배출했다. 해방 이후에도 10만 인구 규모의 도시로는 보기 드물게 4년제 국립대학교를 둘
(공주대학교, 공주교육대학교)이나 보유하고 있다. 공주대학교는 본래 사범대학교였고 공주교대는 대전-세종-충청남도의 유일한 교육대학교이기에 교육자 양성에 특화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문화 도시로서도 공주는 힘이 세다. 구석기 석장리 유적에서부터 백제의 중심 중 하나로서 문화역량이 있다. 또 서로 붙어있는 부여, 미륵사지 등이 있는 전라북도 익산과 함께 백제역사문화 벨트로 계획을 잘 짜면 하루 안에 돌아볼 수 있는 범위에 있다.
공산성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이래 경기도 수원성과 함께 역사 탐방·산책에 최적인 사이트로 떠올랐다. 마곡사, 갑사, 동학사 등 사찰과 계룡산의 문화관광 역량도 탁월하다. 시의 재정이 빈약하기 때문인지 앞서 본 대로 고마나루 같은 중요한 역사·문화 자원의 개발이 미흡한 편이나 잘 보완하면 경주, 안동, 수원 같은 역사·문화 관광 도시로서 발돋움할 여력이 충분하다.
산업 분야에서 사람을 갈아 넣어서 돌아가는 시대는 지났다고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교육과 문화 역량이 뛰어나다면 공주도 어느 거대 도시 못지않은 발전을 이룰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세종시가 행정수도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갈수록 커진다면 공주, 청주, 천안 등도 하나의 ‘수도권’으로 비중이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문명을 향한 젊은이의 그리움과 사랑과 안식에 목말랐던 곰의 염원, 잃어버린 왕도의 꿈과 한이 풀릴 날이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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