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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만드는 웹진 2025년 9월  344번째 이야기

2025년 9월  344번째 이야기

읽다

자세히 바라보아야 아름다운 것들

더 오래,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것들

더 많이 정성을 기울이고, 더 깊이 마음을 쏟은
그 모든 사물과 존재들로부터 우러나오는 영혼의 빛이야말로
‘자세히 바라보아야 비로소 아름다운 것들’의 찬란한 비밀이다.

정여울 작가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살롱드뮤즈> 연재.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데미안 프로젝트>, <문학이 필요한 시간>,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끝까지 쓰는 용기>, <공부할 권리>,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빈센트 나의 빈센트> 등을 썼다.

화려한 아름다움이 아닌, 아주 조용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금방 눈에 확 띄는 아름다움이 아닌, 아주 조용히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보이는 아름다움이 있다. 아무 장식도 없는 소박한 흰 그릇의 아름다움은 오래오래 바라볼수록 더 깊이 마음속에 머무른다. 유럽 황실에서 자주 사용한다는 화려한 무늬와 장식이 가득한 도자기가 아니라, 조선백자, 달항아리, 분청사기가 마음에 더 오래 남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현란한 색채나 복잡한 장식은 처음에는 눈을 현혹하지만, 금세 피로감을 느끼게 한다. 눈에 띄기 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눈에 머무는 아름다움. 눈을 넘어 마음에 스며드는 아름다움은 순간적인 매혹이 아니라 심오한 감동으로 우리의 마음에 노크를 한다.

잠깐의 관심만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자세히 바라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아름다움. 그 첫 번째 기억은 ‘우리 동네 골목길의 아름다움’이었다.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길은 늘상 비슷비슷한 풍경이었기 때문에 한 번도 ‘감상’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그냥 내가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할 ‘배경’처럼 느껴졌고, 공기나 물처럼 당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신기하게 바라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 수십 년 전 살던 골목길에 가서 보니, 그제야 ‘골목길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층 빌딩들로 가득 한 도시의 삭막한 풍경 속에 익숙해지고 나니, 오래 된 골목길의 풍경이 비로소 낯설게 보였던 것이다. 가장 높은 건물이 고작 3층 정도밖에 되지 않는 옛 골목길. 서울에 이런 골목길이 아직 남아 있나 싶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개발이 되지 않은 우리들의 옛 골목길.

그곳에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얼음땡’과 ‘땅따먹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신나게 뛰어놀던 우리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곳곳에 스며 있었다. 지금의 아파트 놀이터에서는 그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바로 그 어린 시절 우리 어린이들의 ‘놀이하는 시간’을 오랫동안 잃어버려 보았기에, 그 상실의 시간 속에서 비로소 옛 골목길의 아름다움이 다시금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이렇듯 자세히 바라보아야 비로소 아름다운 것들은 사실 ‘아주 가까이 있었던 것들’이 아닐까. 너무 가까이 있어서 소중한 줄 몰랐던 그 평범한 골목길의 아름다움은 바로 어린 시절의 추억들, 정겨운 동네 어르신들의 수다, 옆집에서 무슨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지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벽과 벽 사이의 거리에서 우러나오는 정겨움의 흔적들이었다.

자세히 바라보아야 아름다운 것들의 두 번째 기억. 그것은 ‘조용해서 잘 눈에 띄지 않는 것들’에 대한 기억이다. 예를 들면 한옥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무조건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들이 눈에 띄고, 굉장해 보였다. 창덕궁보다는 베르사유 궁전이, 63빌딩보다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멋져 보였다. 그러나 어른이 되니 규모나 크기에서 우러나오는 위용보다는 조용히 반짝이는 것들의 아름다움이 더 깊이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웅장하고 화려한 대리석 건물보다는 사람의 손길과 체온이 느껴지는 소박한 목조 건축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헤세로 가는 길>이라는 책을 쓰면서 목조 건축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었다. 책을 쓰기 위해 헤르만 헤세가 태어난 칼프라는 도시에 방문하여, 알록달록 정겨운 빛을 띤 목조건물들이 긴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 남부 소도시들의 주택은 아직도 목조가옥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최소한 3~400년이 넘는 건물을 매번 정성껏 수리하고, 덧칠하고, 가꾸면서 살아가는 부지런한 사람들을 보면서 목조 건축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렇게 뜨인 눈으로 한국에 돌아오니 북촌 한옥마을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한옥이 불현 듯 간절히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툇마루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던 아주머니들, 겨울이면 처마 밑으로 똑똑 떨어지던 눈 녹은 물소리, 비가 올 때는 마치 무슨 음악소리처럼 들리던 기왓장에 물방울 떨어지던 소리가 그리워졌다. 한지로 바른 장지문 너머로 엄마 아빠가 움직이는 실루엣이 아련하게 보이던 순간도 그리워졌다. 보이면서도 동시에 보이지 않는, 그 장지문의 아련한 매혹이라니. 장지문 너머 안방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아빠는 마치 실루엣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처럼 아련하고 애틋하게 반짝이는 존재들이었다. 나는 엄마, 아빠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는지, 혹시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문틈에 귓불을 대고 있기도 했다. 그런 사소한 사물들, 사소한 추억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자세히 바라보고, 오랫동안 잃어버렸다가, 그것을 결코 다시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에야 그 시절 그 한옥의 아름다움을 간절하게 그리워하게 되었다. 이런 아름다움은 ‘상실’과 ‘되찾음’ 속에서 비로소 빛을 발한다.

자세히 바라보아야 아름다운 것들, 그 세 번째 기억은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사물들’에 깃들어 있다. 내 마음 속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각인되어 있는 병산서원. 그곳의 대청마루가 바로 그런 아름다움의 백미를 연출한다. 병산서원의 대청마루에 앉으면 지금까지 북적이며 살아왔던 모든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며 ‘이곳에서만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머나먼 풍경을 바라보자’는 생각이 든다. 대청마루의 옹이진 부분과 군데군데 드러나 있는 나이테를 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효율적인 시간 관리’를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병산서원의 대청마루에 앉아 있으면 그 장소를 자세히 바라보게도 되지만, 무언가를 꼭 열심히 해내야 한다는 그동안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공간 자체의 아름다움이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번지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병산서원 구석구석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내 마음 구석구석을 자세히 바라보게 된다. 내 마음이 너무 오랫동안 경쟁과 성공을 향한 강박에 길들어 왔음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진다. 이 드넓은 대청마루의 섬세한 나뭇결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풍요로운 영혼의 발자국을 느끼게 된다. 나도 이런 대청마루를 닮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기특한 소원을 가슴에 품고 돌아오게 된다.

드넓은 대청마루처럼 사람들의 모든 피로함을 씻어주는 편안하고도 너른 품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현란한 장식으로 승부하는 아름다움이 아닌, 아무런 장식 없이 가장 간결하고도 원초적인 요소들(기둥, 지붕, 계단 등)만으로도 충만하게 피어오르는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된다. 병산서원의 대청마루에 앉아 있으면 내 마음의 궤적뿐만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의 사연에도 귀 기울이게 된다. 사람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치 할머니 무릎을 베고 옛이야기 삼매경에 빠져드는 어린 아이가 되는 기분이다. 나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긴 적도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아야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무릎을 탁 치며 기뻐한 순간이 다시금 떠오른다.

누군가 아름답다고 해서 덩달아 달려가보는 다급함이 아닌, ‘그냥 나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감정’을 믿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권위가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생각과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 순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이기도 하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아름다운 것들은 단지 ‘아름다움’에만 눈뜨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그 자체’에도 눈을 뜨게 한다.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아름다움에도 눈을 뜨게되는 것이다. 생각하고, 산책하고, 감상하고, 만져보고, 귀 기울이고, 가만히 오랫동안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장소의 아름다움, 사물의 아름다움, 추억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우리 자신의 마음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자세히 바라보아야 비로소 더 고요한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하는 세계의 신비에 눈을 뜬다.

내가 북콘서트를 할 때마다 내 책의 귀퉁이에 온갖 알록달록한 포스트잇을 붙여서 ‘얼마나 이 책을 열심히 읽었는지’를 본의 아니게 들키는 독자들의 마음 또한 아름답다. 책 귀퉁이에 그렇게 많은 포스트잇을 붙이고, 줄을 치고, 메모를 하기까지, 그는 얼마나 자세하게 책을 들여다본 것일까. 그 오랜 고민과 망설임과 탐구의 눈빛 또한 한없이 아름답다. 어떤 사람의 얼굴은 주름마저 아름답게 느껴진다. 젊고 탄력있는 피부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도 멋지지만, 멋진 삶을 살아낸 어르신의 이마나 입가에 번진 주름 그 자체가 눈부신 순간도 있다. 노인의 주름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그가 살아온 발자취 그 자체가 아름다울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웃음주름이 유난히 예쁜 사람, 흰머리 자체가 너무도 눈부셔서 염색하지 않은 상태가 훨씬 아름다운 사람, 나이가 들어도 자세가 워낙 올곧아서 어딜 가든 기품있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아름다움은 삶을 지켜주는 거대한 대들보 같은 아름다움이다. 천천히 또박또박 써낸 손글씨의 아름다움 또한 그렇다. 휴대폰이나 노트북 같은 기계를 활용하여 타이핑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진 요즘, 손글씨로 마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정성스러운 편지는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더 많이 정성을 기울이고, 더 깊이 마음을 쏟은 그 모든 사물과 존재들로부터 우러나오는 영혼의 빛이야말로 ‘자세히 바라보아야 비로소 아름다운 것들’의 찬란한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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