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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만드는 웹진 2025년 11월  346번째 이야기

2025년 11월  346번째 이야기

도시와 역사

잠들지 않는 섬

제주

제주도의 전체 면적은 1850㎢로 제주시만 본다면 남한에서 12번째로 큰 도시이고, 제주시가 서귀포시보다 조금 더 크다. 인구수는 특별자치도 중에서는 2위로 2023년 기준 67만 명이다. 지금은 국내 여행의 성지가 되었으나 탐라의 역사적 의미는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깊다.

한 특산물이 많은 도시

탐라-제주의 1번째 진귀한 산물은 진주였다. 이미 492년에 탐라의 진주를 고구려가 얻어서 북위에 공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탐라국의 해녀(해녀인지 해남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진주란 잠수를 해서 캐내야 하는 산물임을 보면, 삼다도인 제주에는 이미 5세기에 해녀가 있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가 캐고, 신라의 관리들에게 넘겨지고, 고구려의 병사들이 받아서, 다시 북위의 수도 평성에 건너가 여러 선비족 귀족들의 손에서 찬탄의 대상이 된 진주였으니, 이야말로 당시 국제적인 상품으로 첨단을 걷는 명품이었다 해도 좋으리라.

그 뒤에는 다른 특산물로 제주도 땅이 특화되면서 진주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중환의 『택리지』에 “당진과 해남은 제주도와 직접 배가 오가는 곳이라, 진주와 거북 등딱지 등의 귀한 재화의 교역장이 된다”라고 쓴 걸 보면 한참 뒤에도 탐라산 진주의 명성은 쟁쟁했던 것 같다. 2번째는 오늘날에도 제주하면 생각나는 과일, 귤이다. 제주산 귤은 634년, 백제에 금귤을 조공했다는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1052년에는 고려가 탐라의 공납품을 ‘귤자橘子 100포’로 정했다. 고려 말의 문장가 이규보는 “이 귤은 제주 이외에는 없다. 더구나 머나먼 바닷길로 보내왔음에랴? 귀족의 집에서도 얻기 어려운 것이니, 황금 포탄처럼 둥글고 윤기 나는 보배일세”라고 노래했다. 조선에서도 귤은 제주의 첫째 가는 공납품이었는데, 먼 바닷길로 도착한 귤이 오면 임금이 친히 나가서 맞이하고 후하게 포상했으며, 원로와 대신들에게 귤을 나눠주며 생색을 냈다고 한다. 또 황감제라 하여 성균관 유생들에게 귤을 내리고 시문을 짓게 하는 행사가 있었다. 유교국가 조선이 무엇보다 중시하는 종묘제례에도 귤이 빠지지 않았으니, 제주산 귤은 그야말로 과일이 아닌 보배였다.

그렇지만 이규보의 말대로 머나먼 바닷길로 보내다 보니 도중에 풍랑에 휩쓸려 배가 침몰하거나 중국 해안으로 밀려가는 일도 종종 있었고, 시간이 생각보다 지체되어 썩은 채로 들어오는 일도 있어서 조선왕조는 어떻게든 내륙에서도 귤을 재배하려 애썼다. 1412년, 태종이 제주의 귤나무 수백 그루를 순천 등에 옮겨 심도록 한 이후 귤은 『세종실록지리지』의 호남 공납품목에도 기재되었다. 그러나 1521년, 중종은 “감귤을 연해의 각 고을에 옮겨 심어 보았으나 끝내 열매를 맺지 않았다”며 이를 호남의 공납품목에서 삭제했다. 아예 처음부터 열매를 맺지 않았더라면 100년이나 지나서 포기 선언을 했을 리 없으니, 심으면 얼마 뒤 죽고 또 심으면 또 죽고 하는 상황을 무던히도 되풀이했던 모양이다. 그러면 왜 제주 귤은 남해안에서 열매 맺지 못했을까? 당대의 문신들은 “옛말에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다”라며 신토불이를 원인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제주와 순천의 풍토가 특별히 크게 차이날 리는 없다. 모르긴 몰라도, 귤을 기르고 따다 바치는 수고가 싫었던 민심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진주 해녀

아, 반역의 세월이여

기록된 최초의 반란은 1168년에 일어났다. 『고려사』에 따르면 “탐라인 양수良守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영위令尉 최척경, 안무사 조동희 등이 평정했다”라고 한다. 반란의 동기와 배경은 알 수 없다. 이후 20~30년에 한 번꼴로 반란이 나더니, 1270년에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진도를 근거지로 했으나 고려와 원의 연합 공격에 밀려 제주도로 들어가게 되고, 이때 고려의 고여림은 한발 먼저 제주도에 가서 환해장성을 쌓고 삼별초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삼별초군과의 싸움에서 패사했으며, 삼별초는 1271년부터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를 방어기지로 삼고 항쟁을 이어갔다. 1273년에 김방경이 지휘하는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 1만 명이 제주도에 상륙해 삼별초를 맹공격했고, 2개월 만에 삼별초는 힘이 다했다.

삼별초는 최씨 무인정권의 사병과 같은 성격을 가졌었고, 따라서 몽골과의 전쟁이 끝나면 그들이 숙청될 것을 염려해 일으킨 항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구한말 일본군-관군과 맞섰던 의병과 같이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제주의 백성들은 그들과 함께했다. 몽골 침략자에 대한 거부감인지, 주는 것 없이 내내 이용만 해온 정권에 대한 반발인지, 일반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그들과 합세했으며 진압이 그토록 힘들었다. 따라서 민중항쟁으로서의 성격을 띠는 삼별초를 단지 항명이라고만 폄하하면 안된다. 그들이 쌓았고, 최후의 순간 여몽연합군이 타고 올랐던 항과 두리의 성벽은 아직도 제주도에 남아 있다. (중략)

일제강점기에는 제주 잠녀항쟁이 있었다. 1932년에 일본 자본가들과 선주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해녀(잠녀)들이 들고 일어났다. 주동자를 체포하려는 일제와 해녀들 사이에 또 실갱이가 벌어졌다. 이는 일본인과 일본 자본이 토착 어업을 잠식하는 만행에 대한 저항이자 어민들의 생존권을 위한 싸움이었다. 제주도 역사상 가장 처절했으며, 가장 참혹했던 봉기는 1948년 4월 3일부터 진행되었다. 제주도에서 1947년 초, 미군정 시절부터 빚어져 온 경찰과 시민의 갈등이 마침내 대규모 무력 충돌로 불거져 나왔다. 남쪽에는 우익계의 단독 정부가 수립될 전망에 참지 못한 좌익계가 관공서와 우익계를 먼저 습격했고,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8월에 총선이 실시되고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중시하고, ‘공산당과 그 동조자들을 남김없이 색출하고 처단하라. 필요하다면 제주도민 전부를 죽여도 좋다’는 지시를 내려보냈다. 북한에서 재산과 고향을 잃고 내려온, 그래서 빨갱이 하면 눈에 핏발이 서기 마련인 북한 출신들로 이루어진 서북청년단은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군경과 같은 권한을 얻었다. 그들과 군경은 ‘한라산 자락에 거주하는 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공비로 간주해 사살한다’라고 선언했고, 그 선언이 충분히 알려지기도 전에 산골 마을을 습격하여 죽이고 또 죽였다. 마을이 통째로 불타고 시체 더미가 쌓이는 일이 수도 없이 벌어졌다. 마지막 국면에는 한라산에 깊숙이 숨어 있던 좌익무장대원과 양민들을 일일이 찾아내기 힘들다고 판단, ‘산을 내려오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회유했다. 오랜 투쟁에 지친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터벅터벅 산을 내려왔다. 다친 사람은 발을 질질 끌면서, 동료의 어깨에 기대서 간신히 내려왔다. 군경은 그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일렬로 세웠다. 그리고 총을 발사했다. 그나마 즉결처분되지 않고 형무소에 갇혀 있던 반란자들은 6·25 전쟁이 터지자 집단 학살당했다. 2만 5000명에서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다수는 노약자를 포함한 양민이었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을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어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노래를 찾는 사람들, 『잠들지 않는 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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