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금희 일러스트. 오하이오
“네가 신승훈 좋아한다는 애야?”
친구를 만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옆반에서 가수 신승훈의 열렬한 팬이라는 한 여자애가 불러서 내게 이렇게 확인했다. 운동장 벤치였고 겨울이었으며 둘 다 코트를 입고 있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한자로 된 명찰을 썼는데 다행히 어렵지 않은 글자여서 나는 친구 이름을 금세 읽었다. 정아는 이름만큼이나 맑고 단정한 얼굴을 가진 친구였다.
그 뒤부터 우리는 신승훈의 모든 것을 공유했다. 방송 일정, 신보 활동, 학교 근처 문구점에서 팔던 스냅사진, 잡지 기사…… 2학년 때는 같은 반이 되어서 내내 붙어 다니기도 좋았다. 집도 서로 이웃한 동네였다. 그쪽에서 학교까지는 한번에 오는 버스가 없어 갈아타야 했는데, 우리는 종종 만원 버스를 기다리느니 한 시간 넘게 걸리더라도 같이 걸었다.
물론 우리 둘만 있었던 건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내 교우관계의 황금기로 좋은 친구들이 곁에 많았다. 그 당시 이미 키가 170센티미터를 넘었던 J, 우리 학교 패셔니스타였던 L, 수재로 유명했고 실제로도 천재 느낌이 물씬 났던 S. 하교하다 보면 허리를 푹 숙여가며 웃느라 시간은 더 오래 걸렸다. 나는 사실 과거에 대해 꽤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편인데도 이상하게 그 길에서만은 나쁘거나 슬펐던 기억이 없다. 돌아보면 언제나 팔뚝까지 가방을 느슨하게 내려 메고 어슬렁어슬렁 걸으면서 나는 친구들과 하하 호호 웃고 있다.
하지만 이후 어른이 되어가면서 한 명씩 한 명씩 연락이 끊겼다. 각자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시간을 내어 얼굴을 보기도 했지만 이십 대가 되자 완전히 흩어졌다. 그래도 정아는 언제나 먼저 연락하는 친구였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의 삶에 가장 친근한 목격자로 남을 수 있었다. 잠시 유학을 갔던 정아가 거기서 고된 아르바이트로 버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나였고 내가 짝사랑하는 선배를 처음 보여준 사람도 정아였다. (정아는 약간 모호한 표현으로 무척 놀랐다고 했다.) 취업 전선에 서서 분투했던 시간들을 지켜봐준 것도, 각자가 선택한 결혼과 그 생활에 진솔한 고민과 충고를 나누며 삼십 대를 보낸 것도 우리였다.
우리는 여전히 생일을 기념해 만나고 생일카드에 늘 사랑한다고 적는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우리 눈에는 아직 서로가 십대 때 그대로의 모습이다. 친구는 가끔 내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는 “사람들이 말하는 너는 내가 아는 너랑 다른 사람 같아서 신기해”라고 말하고 나는 친구 딸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멋진 엄마가 된 거야, 정말 믿기지가 않아”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가 좋아했던 가수에 대해서도 떠올리는데 우리가 ‘오빠’보다 먼저 기혼자가 되고 심지어 부모가 될지는 몰랐다고 약간은 씁쓸해하게 된다. 그래도 그 시절의 ‘덕질’ 덕분에 이렇게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고.
몇 해 전 우리는 약속을 했다. 지금은 같은 도시에 살지 못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꼭 이웃에 살자고. 비가 오면 부침개를 부쳐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는 거리쯤에. 막상 그 대화를 할 때는 실감 못했는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건 정말이지 대단하고 멋진 일이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나를 십 대 그 아이로 봐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들 그때가 기다려지는 거의 단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가.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너의 도큐먼트>가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너무 한낮의 연애>,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사랑 밖의 모든 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