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읽는 세계사

기사단이 은행의 시초가 된 사건

예루살렘의 탈환, 그러나 계속되는 고난

“하느님의 도시 예루살렘을 되찾다.” 성지를 되찾겠다는 일념하에 모인 기독교 국가들이 ‘십자군’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모였다. 1099년, 첫 출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이제 지중해에 면한 서아시아의 주요 성지들이 모두 기독교인의 손에 떨어진다. 유럽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숨결이 살아 있는 옛 도시를 다시 방문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례는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서아시아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오늘날처럼 대중교통이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면 또다시 산이 나타나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이때 순례객을 보호하겠다는 사람들이 의연히 일어난다. 프랑스 기사 위그 드 파앵이었다. 1119년 그는 기독교 왕국인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2세를 찾아간다. 순례객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성스러운 그들의 뜻에 보두앵 2세가 동감을 표시했다. ‘성전 기사단’의 시작이었다. 보두앵 2세는 자신이 정복한 예루살렘의 모스크를 기사단의 본부로 선뜻 내어줬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과정은 창대했다. 순백의 망토를 갑옷 위에 걸치고 말에 올라탄 전사들. 순례객을 지키겠다는 기사단 아홉 명의 이상에 유럽 전역이 감동한다.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부족들, 기사단에 합류하겠다는 귀족들이 넘쳐났다. ‘청빈’은 기사단이 태동할 때 내세운 지고의 가치였지만, 조직에는 어느새 돈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113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는 성전 기사단을 공인한다. 기사단은 교황의 권위 아래 모든 기독교 국가의 국경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고, 세금을 내야 하는 의무도 면제된다는 내용이었다.

안전하게 여행하고 싶은 욕망

“제 돈을 성지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당대 순례객들은 성지까지 가는 먼 거리에 실물 화폐를 가지고 다니길 두려워했다. 강도나 이교도들에 의해 모두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사단은 순례객의 우려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의 서비스를 만들어 낸다. 지점별 ‘입출금 시스템’이다. 유럽의 기사단 본부에 돈을 맡기면 증서를 하나 내준다. 성지에 도착해 그 증서를 제시하면 기사단 본부에서 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영국에서 입금한 돈을 예루살렘에서 출금할 수 있는 혁신적 서비스였다. 강도들은 순례객이 지닌 증서를 보더라도 그 의미를 도통 알 수 없었다. 억지로 빼앗아봤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현대의 여행자들이 현금 대신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를 들고 다니는 것과 같은 원리다. 경제학자들은 오늘날의 수표가 그때 처음 태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종교와 금융은 서로 배척되는 개념같지만, 역사적으로 둘은 서로를 동력으로 삼아 발전했다. 기사단의 사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최초의 입출금 시스템

수차례 벌어진 십자군 전쟁은 기사단의 규모를 더욱 키워갔다. 수중에 있는 돈과 토지도 그에 비례해 늘어났다. 특히 이들이 제공하는 ‘금융 서비스’도 갈수록 범위가 넓어졌다. 신도들로부터 예금을 받는 것에서 유럽의 주요 국가에 대규모 대출을 시행하는 서비스까지 나아갔다. 순례지의 현지 화폐로 바꿔주는 환전 업무를 담당한 것도 기사단이었다. 기사단이 성직자의 꼼꼼함과 정확함으로 장부를 관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차 십자군 전쟁 당시 프랑스 왕 루이 7세에게 엄청나게 큰 돈을 빌려준 것도 기사단이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세워진 기독 왕국인 라틴 제국의 황제 보두앵 2세 역시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를 담보 삼아 기사단에게 급전을 빌리기도 했다. 기사단이 유럽의 주요 국가들의 대부업자로 활약(?)하고 있었던 셈이다. 기사단은 유럽 전역에 설치된 본부를 활용해 무역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돈과 무역 환경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양모, 목재, 올리브유뿐만 아니라 노예까지 거래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지중해 동부 키프로스섬을 사들이기도 했었다. 지금도 유럽 곳곳에 남아 있는 성전 교회는 모두 옛 기사단이 소유했던 건물이다. 그러나 1187년 충격적 사건이 벌어진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흐앗딘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성지 예루살렘이 다시 무슬림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손에서 벗어난 건 약 700년 후인 제1차 세계 대전 때다). 십자군으로서는 치명적인 결과였지만, 기사단 조직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들이 제공하는 금융 서비스가 유럽에서는 이미 필수적으로 자리 잡은 덕분이다. 이들은 금융 노하우를 유럽의 왕들에게 공유해 세수 확보에 도움을 주었다. 프랑스 왕국의 경우 성전 기사단의 재정 관리로 수입이 120퍼센트나 늘기도 했다.

정경유착으로 위기 맞은 기사단

하지만 권력과 돈이 만나면 부조리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권력과 돈, 즉 정치와 경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유럽의 왕실과 유착해 크게 성장한 성전 기사단은 브레이크를 걸지 않은 채 종말로 달려가고 있었다. 유럽 왕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대출을 실행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디폴트’라는 이름으로 채무 불이행을 선언할 수 있다지만, 중세 유럽의 왕은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을 선호했다. 기사단을 이단으로 기소하고, 그 재산을 처분하는 방법이었다.

가장 큰 조직을 자랑하는 프랑스에서 사달이 일어났다. 필리프 4세가 기사단을 체포하고 이들을 화형에 처했다. 필리프 4세는 숙적 영국, 플랑드르와의 잇단 전쟁으로 감당 못 할 빚을 기사단에게 지고 있었다. 기사단은 저항했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왕에게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 성전 기사단의 재산은 모두 필리프 4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던 유럽의 군주들도 같은 조치를 강행했다. 성전 기사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배경이다(유일하게 남은 조직은 포르투갈의 그리스도 기사단이었다). 기사단의 물리적인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혁신은 민간으로 스며들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 동서양 무역의 핵심으로 거듭난 이탈리아 상인들에 의해서였다. 피렌체, 베네치아 등의 도시는 이미 유럽 여러 나라에 핵심 거점을 마련하고 있었다. 마치 기사단네트워크처럼,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수장 조반니 디 비치 데메디치는 1397년 첫 메디치 은행을 설립한다. 오늘날 은행의 초기 모습을 띠고 있었다. 탁월한 사업수완으로 그들은 이탈리아 금융 산업의 대표주자로 떠올랐다. 로마 교황청이 예금을 맡기는 은행으로 성장했을 정도다. 성전 기사단의 정의감이 오늘날 자본주의 혈관을 담당하는 은행의 모태로 작용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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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일 1998년 12월 1일 / 발행인 정진완 / 편집인 박준태 / 담당자 우리은행 브랜드전략부 조영희 과장(02-2002-4595) / 기획·디자인 경성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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