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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49
도시국가 베네치아의 시작
베네치아의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우선 동로마 제국의 간단한 역사를 알아야 한다. 베네치아가 오랜 기간 동로마 제국의 식민통치를 받았기 때문이다.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이 지중해 동쪽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긴 후 붙여진 이름이다. 거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수도를 옮겼지만, 옛 수도 로마는 상대적으로 치안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야만족인 반달족과 고트족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던 탓이다. 로마는 사실상 야만족의 놀이터로 전락하고 있었다. 명군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제국의 탄생지이자 기독교 성지가 야만족에 유린당하고 있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535년에 옛 땅을 되찾기 위한 전쟁에 나선 배경이었다. 약 20년의 전쟁 끝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탈리아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옛 로마가 전성기에 차지한 영토 대부분을 수복한다. 그의 이름 뒤에는 이제 ‘대제’라는 명칭이 따라붙는다. 이는 베네치아 역시 다시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됐다는 의미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땅에 라벤나 총독부를 설치한다. 파견된 제국의 관리가 이탈리아 전역을 통치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베네치아 역시 라벤나 총독부를 통해 제국의 행정 시스템에 편입되었다. 라벤나 총독부와 베네치아는 바닷길로만 연결되어서 직접 통치가 힘든 구조였기에 다른 도시와는 달리 자치권을 어느 정도 인정받는 도시로 성장한다. 늪지대를 개간해 도시를 만든 특수성도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베네치아 시민들이 직접 뽑은 ‘도제’가 베네치아의 통치자가 된 배경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도제가 있는 도시는 제노바와 베네치아 두 곳 뿐이었다.
명군 뒤에는 암군이 오기 마련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사후 동로마 제국의 힘은 급격히 약해지고 있었다.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반도를 휘젓고 다녀도 동로마 제국은 이에 대응할 힘이 없었다. 751년에는 라벤나 총독부가 무너지기에 이르렀고 이탈리아반도의 난민들이 베네치아로 흘러들었다. 베네치아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외세에 맞서 자치권의 역량을 키워갔다. 작지만 강한 나라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탄생이다.
세계 최초로 공채를 발행하다
“무역만이 우리 베네치아의 힘이다.” 이렇게 자립을 결심했을 때 국력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힘이 약해지자 본인들이 지중해 무역 도시가 되기를 자처한다. 각 도시에 물산과 사람을 나르고, 정당한 이득을 취했다. 지중해 주요 항구와 바닷길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유럽에서 무역을 하려는 이들은 모두 베네치아를 거쳐야 했다. 중동 레반트 지역부터 이집트 앞 홍해까지, 베네치아의 상선이 없는 곳이 없었을 정도였다. 중국까지 여행해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도 베네치아 사람이다.
지도자인 도제들은 공공의 부를 도시에 재투자했다. 베네치아에는 다리, 운하, 방벽, 요새, 아름다운 궁전과 같은 사회기반시설이 매년 새롭게 건설되고 있었다. 무역을 통해 쌓은 항해기술로 함선을 만들어 국방도 튼튼히 했다.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베네치아를 무시할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상업이 발달하려면 그 혈관 역할을 하는 금융가들이 있어야 한다. 베네치아에는 상인만큼이나 많은 은행가가 있었다. 도시의 중심 리알토 시장에는 은행가들이 나무 탁자에 앉아 돈을 융통해 줬다. 오늘날 은행을 뜻하는 영어 ‘뱅크(bank)’는 고대 이탈리아어에서 나무 탁자를 뜻하는 ‘방코(banco)’에서 따왔다. 베네치아 정부는 금융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실험을 단행한다. 베네치아 정부 이름의 채권을 발행한 것이다. 세계 최초의 ‘공채’였다. 채권은 일정한 이자를 주고 돈을 빌리는 일종의 빚문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가 자기 신용을 이용해 국채를 발행하듯, 배네치아도 우량한 정부의 힘을 기반으로 돈을 민간으로부터 조달한 것이었다. ‘프레스티티’라는 이름의 공채가 처음으로 발행된 경제적 사건이었다.
베네치아가 긴급하게 돈을 조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식민 모국이었던 동로마 제국과 군사적 갈등이 임박해왔다.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엘 1세는 1171년 베네치아 상인을 모두 수용소에 억류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조치를 단행했다(후에 십자군으로 참전한 베네치아 군사들이 이슬람 국가와 싸우는 대신에 동로마 제국을 침략한 원인 중 하나였다).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 준비는 세금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도제 비탈레 2세 미카엘이 1171년 공채를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베네치아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 공채를 구매해야 한다는 명령도 내렸다. 보유한 재산 규모에 따라 채권 구매량이 할당되었다. 매년 5퍼센트의 이자를 지급하기로 했지만 원금을 갚는 시기는 확정되지 않았다. 최초의 공채는 이렇듯 강제성을 띤 모습이었다. 모든 베네치아인이 정부의 채권자가 된 셈이었다. 이 채권으로 조달한 자금 덕분에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에 맞설 함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심지어 4차 십자군 전쟁 때인 1204년에는 베네치아 군대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식민지가 식민 모국을 점령해버린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베네치아의 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돈을 빌릴 때의 마음과 갚을 때의 마음은 같지 않다. 베네치아 정부는 원금 상황을 차일피일 미뤘다. 지중해 국가 간 갈등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아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서 베네치아 시민들은 자기가 보유한 채권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2차 시장의 등장이었다. 베네치아의 미래를 밝게 보는 시민들은 채권의 값을 후하게 쳐줬지만, 암울하게 보는 투자자들은 헐값이라도 팔아버렸다. 실제로 베네치아 공채 가격은 비교적 안정기였던 1376년까지는 액면가의 80~100퍼센트로 팔렸지만, 이후부터 1441년까지는 40~60퍼센트까지 떨어졌다. 빚에 허덕이던 베네치아 정부가 이자 지급을 연체했기 때문이다. 다른 도시국가와 전쟁에서도 공채는 유효한 자금 조달 수단이었다. 페라리와 전쟁에서도 제노바와의 갈등 속에서도 밀라노와 결전을 벌일 때도 그랬다. 베네치아에서 공채가 제도화 되기에 이르렀다. 미우나 고우나 베네치아 식민들은 국가가 잘되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공채가 휴지 쪼가리로 전락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반대에 직면한 베네치아 공채
“화폐는 교역에 쓰라고 존재하는 것이지, 이자를 낳으라고 만들어지지 않았다.” 베네치아의 공채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있었다. 카톨릭교회와 수도승들이었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일을 기독교에서 엄히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업 권력과 교회 권력의 정면충돌이었다.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의견과 공채라고 하더라도 기독교 교리에 맞지 않는다는 반박이 맞섰다. 언제나 필요가 논리를 만드는 법, 베네치아 공채 프레스티티를 인정하는 의견이 점차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14세기 철학자 니콜라스 드 앙글리아는 “프레스티티는 베네치아 시민이 강제로 사야 하는 채권으로, 그 안에는 욕망이 들어있지 않다”고 옹호했다. 다른 채권과는 달리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교회 권력도 점점 공채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공공재정으로 포장된 공채는 이제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은 정당한 금융 행위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번영은 한때의 꿈처럼 아스라이 사라져갔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주도로 신항로가 개척되면서 지중해 바다는 중심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주도권을 상실해가고 있었다는 의미다. 혁신은 그럼에도 공기와 같은 것이어서, 시나브로 퍼져가기 마련이다. 유럽의 모든 무역 도시들이 베네치아의 혁신을 도입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공채라는 새로운 자금 조달 방법을 알게 됐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마지막 채권을 발행한 것은 1797년이었다. 나폴레옹이 공화국을 점령하기 직전이었다. 베네치아에서는 사라졌지만 국공채는 이제 만국의 것이 되었다. 2023년 미국 국채시장의 규모는 32조 달러로 추산된다. 세계 금융을 주도하는 미국 주식시장 40조 달러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금융시장의 거대한 축이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시작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