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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50
회계의 나라 네덜란드, 무역의 중심이 되다
“상업 국가에서 회계는 왕이다.”
네덜란드에서는 누구나 숫자에 통달해 있다고 한다. 저잣거리 상인부터, 국가 지도자까지 자금의 흐름을 기록하는 데 능숙했다. 매춘부까지도 회계 장부 작성에 탁월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는 네덜란드가 북해 무역의 중심지로 거듭난 뒤부터 시작된 것이다. 지중해 무역의 강자 피렌체의 상인은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다.
“네덜란드 도시 안트베르펀(현재 벨기에 안트베르펜)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아름다운 도시다.” 유럽 각국에서 흘러들어 온 향신료와 청어를 비롯한 음식물까지, 네덜란드에는 돈과 물산이 넘쳐났다. 시민들은 부(富)를 지키는 데도 탁월했다. 국가 차원에서 복식부기를 장려했기 때문이다. 복식부기는 현금의 흐름을 일회성으로 기록하는 단식부기와 달리 거대를 두 번씩 적는데, 자산과 부채, 자본, 비용, 수익률 모두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복식부기로 보면 돈이 어떻게 들어왔고 어디로 흘러 나갔는지 명료하게 보인다. 재정을 관리하는 데 탁월한 기록법인 것이다. 네덜란드에는 또 다른 명물이 있었는데 바로 회계학교다. 레이던, 델프트, 하우다, 로테르담, 위트레흐트 등 전역에 걸쳐서 회계 교육이 이뤄졌다. 들어오는 부가 흥청망청 쓰이지 않는 배경이다.
네덜란드에 이런 회계적 수학이 깊이 뿌리 내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스며든 삶의 태도 덕분이다. 네덜란드는 영토의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은 나라다. 그 탓에 수로와 관개시설, 제방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국가적 사업이었다. 작업이 조금이라도 허술하게 진행될 경우 네덜란드 땅 전체가 바닷물에 잠길 수도 있었다. 꼼꼼한 공사, 이를 철저히 관리 감독하는 시스템의 필요성이 어느 나라보다도 컸다. 그 일환으로 공사에 쓰일 시민들의 세금이 조금이라도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회계 공부도 장려된 것이다. 척박한 영토라는 시련이 네덜란드 시민을 단련시킨 셈이다.
회계의 중요성을 지도자들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7세기의 지도자인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그는 사생아 출신인 시몬 스테빈을 최측근으로 두었다. 그가 공학과 상업의 최고 지성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스테빈은 수학을 통치로 연결할 줄 아는 학자였다. 그는 시 행정 측면에서도 복식부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군주를 위한 회계>라는 참고서적을 썼을 정도다. 마우리츠는 그를 신뢰해 제방감찰관 및 네덜란드 육군의 최고 행정관으로 임명한다. 네덜란드는 몸집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종교를 내세웠지만 돈이 탐났던 스페인
황금알을 낳는 거위 옆에는 항상 욕심쟁이 주인이 있기 마련이다. 이 상황에서 주인은 네덜란드를 지배한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스페인·이탈리아 북부·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네덜란드까지 지배하는 가문이었다. 수장 펠리페 2세는 항상 검은 옷을 입고 미사를 드리며, 전 세계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서류에 서명하느라 바빴다.
제국은 언제나 ‘고비용’의 정치 체제다.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때로 더 많을 때도 있었다. 돈은 늘 부족했고, 부채에 허덕이는 일이 일상이었기에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서 과세를 지속적으로 강화했다. 개신교의 나라인 네덜란드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부담되는 일도 아니었다. 펠리페 2세는 독실한 가톨릭이었기 때문이다. 이교도를 벌주는 데 세금만큼 좋은 처벌은 없었다. 이와 동시에 펠리페 2세는 개종을 강요했다. “네덜란드인들이 개신교로 남게 하느니, 차라리 나의 왕국 전체를 잃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 네덜란드 당국은 국민에게 ‘종신연금’을 강제해 그 돈을 스페인으로 보냈고, 시민들 마음속에는 스페인에 대한 분노가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압제자 스페인 밑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 시민들이 마침내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1568년 네덜란드 북부 개신교 지역 일곱 개주가 중심이었다(가톨릭을 믿는 네덜란드 남부 지방은 훗날 벨기에로 분열한다). 돈과 자유를 모두 빼앗으려는 군주를 더 이상 모시지 않겠다는 선언, 죽을지언정 자유인으로 남겠다는 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선 남자가 바로 ‘침묵공’ 빌럼으로, 앞서 소개한 마우리츠의 아버지였다. 그 역시 오라녜 공작이라고 불렸는데, 이 호칭은 이후 네덜란드 총독에게 세습된다. 오라녜는 오렌지의 네덜란드식 발음으로, 이렇게 불린 데는 배경이 있다. 프랑스 남부 오랑주 지역을 다스리던 빌럼의 사촌 르네드 샬롱이 후사 없이 죽자, 빌럼이 이 영지를 상속받게 된다. 지금의 프랑스 오랑주와 네덜란드·벨기에를 아우르는 거대한 땅이었다. 오랑주는 오렌지의 프랑스식 발음으로, 오라녜와 같은 말이다(여기서 오랑주는 켈트 신화 속 물의 여신의 이름을 딴 지명으로, 과일 오렌지와는 관련이 없다. 후대 네덜란드인들이 동음이의어인 것에 착안해 오렌지색으로 국가의 상징을 만든 것이다). 물론 영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함부르크 제국에 충성을 다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빌럼은 가톨릭교도였지만, 개신교에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다. 종교가 다르다고 시민을 죽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합스부르크와 벌인 전쟁에 선봉에 나선 배경이다. 반 개신교 정책을 강요하는 펠리페 2세에 반대하며 그는 외쳤다. “나는 가톨릭교도지만, 군주가 신민의 영혼을 빼앗고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찬성할 수는 없다!”
중앙은행의 등장
인구 1,000만 명의 합스부르크 제국과 100만 명의 네덜란드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스페인 제국 군대가 네덜란드의 핵심 무역 도시 안트베르펀을 공격하면서 부유한 장인들과 상인들이 모두 북부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 결과 네덜란드의 중심이 암스테르담으로 바뀌었다. 즉 암스테르담이 세계 제일의 무역 도시가 되었다는 뜻이다.
1581년 네덜란드는 황제를 패배시키고 공화국임을 천명한다(다만 실제 역사는 동화와 다르기에, 지지부진한 전쟁은 1648년까지 계속된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80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네덜란드는 진정 위기에서 배울 줄 아는 국가였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한 뒤 암스테르담 주도하에 공공은행을 설립한다. 1609년 1월 ‘암스테르담 은행’이 등장했는데, 이 은행은 오늘날 중앙은행의 기원이라고도 여겨진다. 이 은행 설립의 목적은 뚜렷했다. 네덜란드 통화의 가치를 지키는 것. 스페인의 세금 착취로 동전 주조량이 급증하면서 통화 가치가 떨어지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독립 후 처음으로 발행한 은화 라이크스달더에 약 25그램의 순은을 정확하게 넣어 주조한다. 그전까지 동전의 금속 함유량은 구너력에 의해 자주 변해왔다. 하지만 순은의 비중을 일정하게 함으로써 가치 변동성을 줄이고자 했다. 은화 제조는 회계사 네 명이 달라 붙어 철저한 관리 속에 진행되었다. 암호화폐인 비트코인이 중앙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꿈꾸며 태동했듯, 암스테르담 은행 역시 제국 권력으로부터 탈주를 목표로 삼았다. 금융은 경제 혈관의 핵심이다. 암스테르담 은행이라는 기반 아래 네덜란드 상인들은 세계로 뻗어나갈 동력을 얻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부터 이미 네덜란드 상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무역 루트를 하나하나 공략하기 시작했다. 코르넬리스 드 호우트만, 야콥 판 넥 등 거물 상인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의 경제 영토를 넓혀갔다.
인도네시아에는 오늘날의 금과 같은 가치가 있는 향신료인 후추를 수출하는 항구 반템이 있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많은 함대를 가지고 인도네시아를 꾸준히 두드렸다. 제국주의의 초기 모습이었다. 많은 선원이 죽기도 했지만 400퍼센트가 넘는 이익이 돌아오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사업이었다.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로 직접 출항하는 함대는 늘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