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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50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포츠 경기가 끝나고, 우승자는 번쩍번쩍한 황금빛 트로피를 치켜들며 환호한다. 승자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트로피다. 그런데 트로피의 시작은 사실 우승이나 영광이 아닌 패배였다. 고대 전장에서 패배를 기록하던 표식이 어떻게 승자의 상징으로 의미가 바뀌게 되었을까?
트로피는 원래 ‘패배’를 의미했다?
스포츠 경기에서 ‘우승’하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것이 있다. 반짝이는 금빛 컵 혹은 조각상, 트로피다. 트로피는 곧 승리의 상징이며 정복자의 표식이다.
트로피가 처음부터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트로피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트로파이온(tropaion, 패배)에서 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적군이 패배한 그 지점에 쓰러진 적의 무기나 갑옷을 걸어놓는 기념 구조물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트로파이온인데, 승자의 영광을 직접적으로 과시하기 위함이라기보다 적이 패배해 돌아선 자리를 기록하는 상징이었다. 결국 트로피는 승리의 깃발이 아니라 패배의 흔적 위에 세워진 표식이었던 것이다.
이후 로마인들도 그리스인의 전통을 계승했는데, 전리품을 전쟁터가 아닌 로마 시내에 높은 기둥 모양의 기념물로 만들어 세웠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도시에 있으면 정치적으로 선전하는 효과가 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트로피는 어떻게 패배의 자리에서 우승의 상징으로 의미가 바뀌었을까. 전쟁의 형태가 변하고 국가 간 대규모 전투가 줄어들면서 트로파이온은 더 이상 실제 무기를 걸어두는 구조물이 아니라 ‘승리를 기념하는 물건’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만 남았다. 패자가 후퇴한 지점을 표시하던 표식이 점차 승자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념물로 해석되기 시작한 것이다.
패배의 표식에서 성취의 상징으로
중세 이후 트로피는 전쟁을 넘어 사냥, 경기, 경쟁 등 다양한 분야로 서서히 확장됐다. 패배의 현장을 기록하던 물건이 점차 ‘뭔가를 이뤄낸 증표’라는 개념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근대 스포츠의 등장이었다. 19세기 들어 영국을 중심으로 축구, 크리켓, 육상 같은 근대 스포츠가 제도화되면서 승패를 겨루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 전장에서 벌어지던 승패의 다툼이 경기장 안에서 공정하게 경쟁하는 것으로 재편됐다. 국가나 세력 간의 전투가 아닌 개인과 팀이 규칙 안에서 겨루는 이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예전처럼 적의 갑옷이나 전리품은 더 이상 승리를 상징할 수 없었다. 대신 컵, 방패, 조각상 같은 형태의 상징적, 장식적인 기념물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경쟁을 통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이에게 수여됐다.
이렇게 트로피는 더 이상 누군가의 패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손에 쥐는 결과물이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의미가 바뀌었어도 단어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트로피는 여전히 승자에게만 주어지고 그 순간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패배를 전제로 한다. 다만 더 이상 패배한 이가 후퇴한 자리에 주목하지 않고, 남은 자의 손에 집중하게 되었을 뿐이다.
트로피는 승리의 깃발이 아니라 패배의 흔적 위에 세워진 표식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