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는 여행

한여름 화엄사의 그늘로

화엄사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진다. 짙은 숲 아래로 서늘한 그늘이 이어지고, 겹겹이 포개진 기와지붕 뒤로 지리산 능선이 모습을 드러낸다. 천년의 시간을 견딘 전각과 석탑 앞에 서면 좀처럼 눈을 뗄 수 없다. 이곳에서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 천천히 걷고, 오래 바라보며, 잠시 마음을 쉬어가면 그만이다.

AM 10:00

#불견불문불어 #화엄사숲길 #여름산사

화엄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화엄사상의 중심 사찰로 자리해왔으며,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다. 경내 곳곳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전각과 석조 문화유산이 자리한다. 서로 다른 시대의 건축물과 석탑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은 화엄사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야외 박물관처럼 느끼게 한다.

‘지리산화엄사’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뜻밖의 얼굴들이 여행객을 반긴다. 눈을 가린 불견(不見), 귀를 막은 불문(不聞), 입을 가린 불어(不語). 길을 따라 나란히 앉은 세 불상은 통통한 볼과 반달 같은 눈웃음을 하고 있다. 천년 고찰의 첫인상은 의외로 귀엽다.

귀여운 불상 앞에서 사진을 남기다가, 아래 적힌 글귀에 시선이 멈춘다. 남의 허물을 보기 전에 나를 먼저 돌아보고, 비방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으며, 결국 내게 돌아올 험한 말은 애초에 입 밖으로 내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일상에서 자꾸만 놓치는 말들. 때로는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고 조용히 일러주는 듯하다.

세 불상을 지나 발걸음을 옮길수록 산사의 고요는 한층 깊어진다. 그 정적을 따라 돌담길을 걷다 보면 금강문과 천왕문이 차례로 나타난다. 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바깥의 소음은 멀어지고, 오래된 전각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볕은 여전히 뜨겁지만 나무 그늘 아래에 서면 한여름의 열기도 이내 잦아든다.

AM 11:00

#보제루 #대웅전 #각황전 #석등

천왕문 안쪽으로 들어서면 돌계단을 따라 전각들이 층층이 모습을 드러낸다. 넓은 계단 양 끝에서는 용과 사자를 닮은 돌조각들이 여행자를 내려다본다. 모서리는 둥글게 닳았지만 쩍 벌린 입과 부릅뜬 눈매만큼은 여전히 생생하다.

몇 걸음 더 오르면 용의 입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석조 수조가 보인다. 예부터 산에서 내려온 물을 받아두고 사용하던 시설로, 지금도 맑은 물이 쉼 없이 흘러든다. 한여름의 산사를 더욱 서늘하게 만드는 건 어쩌면 이런 작은 장면인지도 모른다.

수조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웅장한 보제루가 앞을 막아선다. 옆으로 돌아 마주하면 반듯하지 않은 기둥, 빛바랜 문짝, 세월에 닳은 나뭇결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화려한 장식 없이 세월을 품은 나무 모양 그대로 서 있다.

중심 마당에는 대웅전이 있고, 그 앞에는 동·서 오층석탑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얼핏 보면 비슷하지만 인상이 다르다. 동탑은 장식을 덜어내 단정하고, 서탑은 기단에 조각을 더해 화려하다. 닮은 듯 다른 두 탑을 번갈아 보는 재미가 있다.

이토록 소중한 유산은 자칫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다. 화엄사가 지나온 시간은 순탄치 않았다. 임진왜란 때 전각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했고, 한국전쟁이라는 모진 풍파 속에서도 사찰 전체가 불타 없어질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고비마다 이 귀한 터를 온몸으로 지켜내려 했던 이들의 간절함이 없었다면 결코 마주할 수 없었을 지금의 풍경. 여러 번의 화마를 이겨내고 기적처럼 살아남은 기둥과 처마라 생각하니, 바랜 나뭇결 하나조차 예사롭지 않고 애틋하게 다가온다.

PM 1:00

#사사자삼층석탑 #효대 #돌계단 #지리산풍경

각황전 왼편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효대로 향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제법 가파른 경사다. 하지만 한 칸씩 발을 디딜 때마다 거짓말처럼 각황전 지붕은 발아래로 낮아지고, 그 너머로 지리산 능선이 파도처럼 넓게 펼쳐진다. 땀을 훔치며 계단 끝에 올라서면, 마침내 사사자 삼층석탑이 여행자를 기다린다.

몸을 곧게 세워 탑을 떠받친 네 마리의 사자, 그리고 그 한가운데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서 있는 인물상. 우리가 흔히 보아온 반듯한 석탑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다. 단단한 화강암을 깎아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사자의 흩날리는 갈기와 생생한 표정, 인물의 부드러운 옷자락 주름까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고 정교하다. 어느 하나만 유별나게 주인공이 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화엄사가 가진 묘미 아닐까.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16 2층

화엄사를 천천히 둘러봤다면 가까운 카페 화장에서 잠시 숨을 고르자. 건물 2층에 자리한 카페로, 창가 좌석이나 야외 테라스에 앉으면 지리산과 노고단 방향의 산세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차 한 잔과 함께 탁 트인 풍경을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자리다. 실내는 과하게 꾸미지 않아 오히려 편안하다. 단정한 원목 테이블과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 음료 곁에 살포시 놓인 작은 들꽃 한 송이가 아늑한 분위기를 더한다. 화엄사에서 머문 시간의 여운을 그대로 품은 채, 여행을 천천히 마무리하기 좋은 곳이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 장수길 3-2

화엄사에서 차로 약 10분 이동하면 고택 쌍산재에 닿는다. 낮은 대문을 지나면 단정한 한옥이 먼저 보이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대나무숲길과 돌담, 별채, 너른 마당이 차례로 이어진다. 쌍산재는 한 공간만 둘러보는 곳이라기보다 여러 채의 한옥과 정원을 천천히 걸으며 살펴보는 곳이다. 길을 따라 이동할 때마다 새로운 마당과 건물이 나타나고, 문 사이로 서로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규모가 제법 넓어 서두르지 않고 둘러보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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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일 1998년 12월 1일 / 발행인 정진완 / 편집인 박준태 / 담당자 우리은행 브랜드전략부 서경 과장(02-2002-4479) / 기획·디자인 경성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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