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읽는 세계사

존 2세는 왜 영국 역사에 없을까?

에드워드는 8명인데 존은 단 한 명

유럽의 왕명(王名)은 같은 이름이 여럿 반복된다. 전임 왕에 대한 존중 때문이다. 영국 역사에서 헨리와 에드워드라는 이름을 사용한 왕이 각각 여덟 명, 조지가 여섯 명, 윌리엄과 찰스가 각각 세 명, 엘리자베스가 두 명인 배경이다. 그런데 딱 한 번만 쓰였던 몇 안되는 이름 중 하나가 ‘존’이다. 그 누구도 그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국에서 변기 이름을 존이라고 부른 이유도 그로부터 시작했다는 농담이 전해질 정도였다. 그가 ‘빌런’으로 전락한 데는 복잡한 가정사가 존재한다. 아버지 헨리 2세는 거물 중 거물이었는데, 다름 아닌 영국 왕국의 영토를 그레이트브리튼 너머 프랑스까지 크게 확장한 왕이었다. 프랑스 왕국에서도 가장 알짜배기인 땅들이었다. 헨리 2세의 영토 확장 비결은 칼이 아닌 ‘사랑’이었다. 프랑스의 옥토인 아키텐의 귀족 엘레오노르가 시집오면서 너른 영지를 지참금으로 가져온 것이었다. 프랑스 왕 루이 7세는 미친 듯이 괴로웠다. 헨리 2세에게 시집간 엘레오노르가 그의 전처였기 때문이다. 부자 아내를 신하에게 빼앗긴 셈이었다(헨리 2세는 영국 왕이었지만 동시에 프랑스 영지의 봉건 영주로서 프랑스 왕의 신하이기도 했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남부 특유의 열정을 품은 여인이었다. 지고지순한 여인을 원해왔던 루이 7세와는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엘레오노르가 결별을 고하고 영국 왕 헨리 2세와 재혼을 선언한다. 포도가 많이 나는 땅, 프랑스의 ‘와인 잔’으로 통하는 아키텐이 루이 7세의 손에서 헨리 2세에게 넘어간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후에 영국이 ‘제국’이라는 이름을 달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는 아들만 다섯을 두었다. 그중 셋째 리처드는 사자의 심장을 가졌다는 뜻에서 ‘라이언 하트’라는 별명이 붙은 용맹한 장군이었고, 존은 사랑받는 막내였다. 헨리 2세의 치세는 견고한 성과 같았다.

훌륭한 형에게 열등감 폭발한 동생의 흔한 이야기

‘제국’을 건설한 헨리 2세는 독불장군의 전형이었다. 한 치의 권력도 가족과 공유하지 않았다. 기력이 쇠하는 나이가 되어서도 권력 이양을 준비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아내 엘레오노르의 조언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1174년 결국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의 수장은 헨리 2세의 아들들이었다. 셋째 리처드와 넷째 제프리가 주역이었고 그 뒤에는 엘레오노르가 있었다. 아들들은 힘과 혈기가 넘쳤지만, 아버지의 원숙한 기량에 미치지 못했다. 헨리 2세는 군사적, 정치적 지식을 기반으로 자식들의 반란을 손쉽게 진압했다. 막내 존은 반란에는 합류하지 않았으나 깨달은 게 있었다. 가족보다 중요한 건 힘과 권력이라는 원칙이었다. 첫 반란으로부터 15년 후, 영국의 왕좌에 라이언 하트 리처드가 앉았다. 헨리 2세가 숨을 거둔 뒤였다. 존이 왕이 될 기회는 사라진 듯 보였다. “십자군으로 가서 성지를 탈환하겠다.” 새 왕 리처드의 야망은 저 멀리 예루살렘에 가 있었다. 이슬람이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하는 것이 그의 인생 목표였기 때문이다. 영국의 왕이 된 뒤에도 그의 꿈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3차 십자군에 합류했다. 군주가 부재한 나라에서 조용히 미소 짓는 남자는 리처드의 동생 존이었다. 존은 국정을 빠르게 장악해갔다. 행정과 사법을 틀어쥐었는데, 야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형이자 왕이었던 리처드의 힘을 빼는 전략까지 병행했다. 프랑스 왕에게 리처드의 프랑스 내 영지를 탈환할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을 마치고 리처드가 신성 로마 제국 하인리히 6세에게 포로로 잡히자 돈을 제시하면서 더 오 래 가둬둘 것을 종용했던 것도 동생 존이었다. 존은 동맹인 프랑스 왕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악마가 풀려났다.’ 리처드가 귀향한다는 소식이었다. 가까스로 잡은 권력을 놓아야 할 위기가 닥치자 존은 마지막 발악을 한다. 군사 반란이었다. 그러나 개는 호랑이를 이길 수 없었다. 존은 십자군의 영웅 리처드 1시에게 처참히 패배한다. 존에게 리처드는 미소를 지었다. “존을 풀어주어라. 단지 사악한 아첨꾼들을 만난 어린아이다.” 사자의 심장을 가진 남자의 배포였다.

준비되지 않은 왕이 불러온 비극

하늘이 준 기회가 존에게 다시 찾아왔다. 반란으로부터 4년 뒤 리처드 1세가 41세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이다. 권력은 존의 차지가 되었다. 존의 통치 키워드는 ‘힘과 의지’, 군주가 원하는 대로 국정이 운영되어야 한다는 군주 중심적 사고방식이었다. 이때 영구그이 정치적 위기를 유심히 지켜보던 사내가 있었다.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였다. 프랑스의 옥토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이 영 마뜩잖던 차였다. 하늘이 프랑스에 ‘존’이라는 기회를 내려준 것처럼 보였다. 필리프 2세는 존의 프랑스 영지인 노르망디를 공격했고, 4년의 전쟁 후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존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그의 군사적 능력은 프랑스에 한참 뒤처져 있었다. 옥토는 프랑스 왕조에 다시 귀속되었다. 존이 ‘땅이 없다’는 뜻의 ‘결지왕’으로 불리게 된 배경이다. “많은 세금을, 그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라.” 어리석은 군주는 반성할 줄 모른다. 존은 잃어버린 노르망디를 수복하기 위한 복수전에 국력을 총동원했다. 군자금이 부족하다는 만류에도, 그는 귀족들에게 세금을 더 낼 것을 거침없이 요구했다. 존이 왕으로 재위한 17년 동안 부과된 세금만 11회에 달했다. 존의 선대 왕 셋의 재위 기간을 합쳐(89년) 부과된 과세 횟수와 같다. 그가 얼마나 자의적으로 세금을 거둬들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총동원되었다. 돈을 받고 관직을 팔거나, 독신을 고수하는 과부들에게도 세금을 매겼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유대인에게 엄청난 세금을 부과한 것도 존이었다. 세금 납부를 거부하는 귀족이나 영주의 영지를 몰수하는 조치도 병행했다. 그야말로 가렴주구(苛斂誅求: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음)였다.

정치가 만든 디플레이션

혼란한 정치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건 불변의 진리다. 영국의 민간 경제는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고 있었다. 화폐로 이용되어야 할 은이 모두 군자금으로 수탈되면서, 물건은 있는데 이를 거래할 화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거래는 이뤄지지 않고 경제는 서서히 죽어갔다. 통화량 축소에 따른 물가 하락과 경기 침체가 맞물리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정치가 초래한 비극이었다. 귀족도 평민도 모두가 불행한데, 왕만 행복한 세계였다. 한참 후대에 유행한 문학의 소재 ‘로빈 후드’가 존의 통치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유다. 하지만 노르망디를 탈환하려는 존의 야망은 무위로 돌아갔다. 1214년 부빈 전투에서 존은 또다시 패배를 맞았다. 귀족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세금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존의 명령을 거부했다.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후세 역사가들이 ‘채무자들의 반란’이라고 부른 귀족들의 봉기였다. 반군 귀족들은 결연했다. 존에게 수탈당하면서 사느니, 죽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신의 군대’로 선언하면서 노샘프턴에 모여 런던으로 진군했다. 귀족들은 도시 하나하나를 손쉽게 함락했다. 점령이 이뤄질 때마다 반란군의 숫자는 불어났다. 그 어떤 귀족도 존의 편이 아니었다. 외골수인 존도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1215년 6월 윈저성 근처 러미니드 평원에 침울한 표정의 존이 도착한다. 그 앞에는 반군 지도자들이 서 있었다. 이들의 손에 커다란 종이가 쥐여 있었다. 마그나 카르타였다. ‘영국의 자유민은 법이나 재판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유, 생명, 재산을 침해받지 않는다. 왕의 명령만으로 세금을 거둘 수 없다. 과세하기 위해서는 귀족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왕 위에 법이 있음을 천명한 명문이었다. 권력으로부터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처음 문서로 기록된 것이다. 25명의 귀족은 대헌장이 실질적으로 지켜지는지 감시하는 기구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절대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기구다.

자유의 상징,마그나 카르타

존은 마그나 카르타를 무효로 하기 위해 군사 행동을 자행한다. 하지만 그가 맞이한 건 또 다른 패배였다. 그리고 그 직후 죽음을 맞았다. 폭군의 비참한 종말이었다. 400년 후 스튜어트 왕조가 왕권신수설로 왕의 신성불가침 권리를 주장할 때도, 영국의 군인들이 식민지 미국을 억압할 때도, 자유를 염원하는 시민은 언제나 마그나 카르타를 꺼내 들었다. 영국 의회 민주주의가 꽃을 피운 배경이었다. 존도,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도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후대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받으면서도 마그나 카르타의 정신은 살아남았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법전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권리가 적혀있다. 이러한 인간의 진보를 이끈 건 역설적으로 존의 자의적 통치, 그리고 폭력적 과세 행위였다. 폭군을 거울삼아 우리는 자유를 향해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세계사에 성군들만이 존재했다면 우린 아직도 봉건제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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