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읽는 세계사

대화재가 바꾼 런던의 겉과 속

세인트폴 대성당

아주 사소한 부주의가 도시를 집어삼켰다. 길을 잃은 불꽃이 목재로 된 집기를 먹이 삼아 덩치를 키웠기 때문이다. 한 집을 먹어 치우더니, 그 옆집에 또 그 옆집까지…. 걸신들린 화마는 주린 배를 움켜잡고 도시를 가로질렀다. 몸집이 불면 불수록 녀석은 더 많은 먹잇감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닷새 뒤, 도시를 전부 잿더미로 만들고서 화마는 사라져 버렸다. 가족이 먹고 마시고 대화를 나누던 따뜻한 공간은 폐허가 되었다. 신에게 기도하던 신성한 예배 공간도, 쾌락의 일탈로 가득한 매춘업소도, 왁자지껄 술을 마시던 주점도 이젠 아스라이 사라졌다. 도시에는 집을 잃고 길바닥에 나앉은 시민이 가득했다. 웃음과 행복은 검은 연기와 함께 증발하고 울음과 분노, 좌절만이 자욱했다. 대재앙이라고 불린 1666년 런던 대화재였다. 화재는 많은 걸 태웠지만, 역설적으로 그 잿더미는 더 튼튼하고 강력한 시스템의 자양분이 되었다. 소방 시스템과 더불어 오늘날 금융의 핵심 중 하나인 보험 산업이 태동했기 때문이다.

작은 빵집에서 시작된 저주

‘1666년 9월 초 런던 푸딩 레인의 한 작은 빵집. 한밤중 이곳에서 시작된 불은 빵집을 삽시간에 태워버리고 도시로 빠르게 번졌다. 당시 런던의 가옥은 대부분 목조 건물이었다. 불이 만찬으로 삼기에 딱 좋은 것들이었다. 사람들이 템스강의 물을 길어와 꺼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닷새 동안 불은 런던을 그야말로 초토로 만들었다. 1만 3,200여 채의 가옥이 사라졌다. 런던 전체 80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80개가 넘는 교회도 전소되었으며, 상점과 곡식 창고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이재민의 수가 10만 명에 달하자 사람들은 신의 저주라고 울부짖었다. 경제적 피해는 오늘날 화폐 가치로 4조 원이 훌쩍 넘어서는 걸로 추산된다. 마침 666은 요한계시록에서 말한 악마의 숫자였다. 1666년에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들에게 내린 천벌처럼 보였다. 1년 전인 1665년에도 흑사병이 창궐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 터였다. 그야말로 재앙 중 재앙이었다. 가톨릭 국가인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개신교 국가인 영국)런던이 신의 징벌을 받았다’는 내용의 팸플릿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집을 잃고 화가 난 시민들이 가톨릭을 신봉하는 외국인을 공격해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인간의 위대함은 재앙 속에서 드러난다. 국왕 찰스 2세(Charles Ⅱ)가 귀족들과 협력해 도시 재건 사업을 신속하게 착수한다. 왕은 위기 앞에서 분열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찰스 2세와 의회는 런던 재건 특별위원회를 꾸렸다. 런던 재건법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빨리 통과되었다. 런던의 건물을 목재가 아닌 벽돌이나 석재로 지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석조 건물로 가득한 런던의 모습이 이때 윤곽을 처음 드러내기 시작했다. 재건 총책임자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이었다. 런던의 대표 건물인 세인트폴 대성당이 그의 작품으로, 이 건물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습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날 때부터 불길을 자궁 삼아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불에도 쓰러지지 않게 하겠다는 건축가들의 마음도 방염포로 작용했다.

다시 불타지 않는 건물을 세우다

원대한 계획은 언제나 비용에 발목 잡히기 마련이다. 런던 도시 재건도 마찬가지였다. 세금을 거두려고 해도 이재민이 너무 많아 돈을 낼 수 있는 사람 수가 적었다. 상점도 대부분 불에 타버려 경제는 마비에 가까운 상태였다. 이때 런던시가 묘안을 냈다. 도시 재건 채권을 발행하는 것이었다. 이자율은 4퍼센트로, 당시 시장 채권 평균 이자 10퍼센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그러나 런던 사람들은 기꺼이 이 채권을 샀다. 도시 재건이 사익에 우선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국이 다시 일어서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낮은 이자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무너진 도시를 재건하는 일은 애국심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수요를 읽고 명민하게 움직이는 상인의 욕망이야말로 도시의 대들보가 된다. 영국이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욕망의 경제학’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폐허를 재건하면서 돈을 벌려는 사업가가 등장했다. 니컬러스 바본(Nicholase Barbon)이었다. 원래 의사였던 바본은 대화재 사건 후에 전업을 결심했다. 건축업에서 돈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벽돌공·석공·목수들을 한데 모아 주택 공급에 나섰다. 때로는 공터에 허가도 없이 집을 짓기도 했는데, 정부는 불법임을 알면서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집 한 채가 절실한 상황에서 법을 운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 년 안에 니컬러스 바본은 런던에서 제일 잘나가는 건축업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비도덕적인 인간이었지만, 돈을 버는 데는 천부적이었다.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구할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바본은 집을 지으려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줬다. 그리고 집이 완성되면 이자와 함께 원금을 회수했다.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해도 문제없었다. 담보로 잡은 집을 가져가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주택담보대출의 첫 등장이었다. 돈을 벌려는 바본의 이기심이 런던 재건의 반석이 되고 있었다.

불타더라도 살아갈 대비책을 마련하다

바본의 사업 전략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집을 지어주면서 런던 시민들의 마음속에서 공통된 응어리를 읽어냈다. 큰불에 대한 트라우마였다. 평생 일군 재산과 생활 터전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도 사업 기회를 포착한다. 평소에 조금씩 돈을 내고 불이 났을 때 보상을 받는 화재보험 사업이었다. 1680년 바본은 세계 최초의 화재보험 전문기업 ‘파이어 오피스’를 설립한다. 사업은 그야말로 초대박이었다. 런던 사람들의 오랜 근심을 해결해준 덕분이다. 새로이 재건된 런던 가옥 5,000채가 이 보험에 가입할 정도였다. 전체 가옥 5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보험의 핵심은 위험의 분산이다. 바본은 ‘남의 집 불구경’이나 하고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소방대를 직접 운영하면서 보험에 가입된 집의 안전을 살뜰히 챙겼다. 가옥의 안전이 자신의 수익으로 이어지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소방이라는 공공 서비스의 시작이 한 사업가의 욕망에 의해 잉태된 것이다. 런던의 모델은 전 유럽으로 확산했다. 함부르크, 파리에도 화재보험 회사가 잇달아 생겨난다.

바본의 사업 모델은 ‘보험’이라는 거대한 산업의 씨앗이 되었다. 화재보험의 성공을 본 상인들은 여러 분야에 이 사업을 응용했다. 생명보험도, 해상보험도 바본의 성공을 모델 삼아 생겨난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보험이라는 안전장치가 생겨나면서 상인들의 도전적인 투자도 덤으로 따라왔다. 모든 재산이 불에 날아갈 걱정을 더는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오늘날 보험 산업의 세계 시장 규모는 약 1경 307조 원에 달한다. 대화재는 런던이라는 도시의 파이를 키웠다. 집을 잃은 이재민들이 런던을 빠져나가 근교에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시장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웨스트엔드라고 불리는 지역이 이때 형성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화재는 역설적으로 런던의 상인을 지방으로 내쫓았다. 기업가 정신은 자리를 옮긴다고 시들지 않기에, 지방에서도 새로운 터전을 일군 상인들이 지방 도시들을 키워냈다. 브리스틀,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같은 도시들의 상업 규모가 대화재 이후 커졌다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불은 또한 영국인을 통합하는 도구가 되었다. 집을 잃은 사람들을 가엽게 여기고, 돈이 없어 부랑하는 시민들을 돕는 온정의 손길이 전국에서 이어졌다. 하층민과 귀족 가릴 것 없이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시 대화재가 영국 시민사회의 공동체 의식을 높여줬다는 분석도 있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목조 건물이 사라진 자리에 근사하고 웅장한 석조 건물이 들어서면서 비위생적인 환경도 개선되었다. 그 결과 전염병의 위험도 낮아졌다.

대화재를 극복한 시민의식의 성장

이렇게 물리적인 불은 사라졌지만, 그 잔불은 정치적 갈등에 옮겨붙었다. 찰스 2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JamesⅡ)가 다시 의회를 무시하고 절대왕정을 시도하면서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다가 결국 참수된 아버지 찰스 1세(CharlesⅠ)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었다. 과거 왕당파와 의회파가 9년 동안 치열하게 대립한 내전의 불씨가 다시 촉발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분열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더 이상 절대군주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대화재가 만들어 놓은 통합이라는 기념물이 우뚝 서 있었다. 도시를 재건하는 건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시민의식, 명민한 상인들의 경제 감각, 시민들의 의견을 살뜰히 반영하는 정치 시스템이라는 걸 알았다. 절대군주 하나로는 결코 일굴 수 없는 성취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1688년 영국 시민들은 제임스 2세를 내쫓는다. 그리고 그의 딸 메리 2세(MaryⅡ)와 남편 윌리엄 3세(William Ⅲ, 네덜란드 통치자인 오라녜 공작 빌럼 3세의 영국식 표기)의 공동 군주 체제를 준비한다.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이뤄져 ‘명예혁명’이라고 부르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1666년의 대화재는 도시를 삼켜버린 마그마였다. 펄펄 끓는 용암에 의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런던은 이 잿더미의 화산토를 옥토로 일궈 수많은 결실을 맺었다. 아름다운 석조 건축물의 도시도, 권력에 굴하지 않는 시민 정신도, 세계를 선도하는 자본주의 시스템도 그 결과물이다. 오늘날 모든 국가가 꿈꾸는 이상이 대화재 속에서 태어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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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일 1998년 12월 1일 / 발행인 정진완 / 편집인 박준태 / 담당자 우리은행 브랜드전략부 서경 과장(02-2002-4479) / 기획·디자인 경성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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