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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51
4월의 공기는 조금 다르다. 3월의 설레는 떨림이 가라앉고, 처음의 낯섦도 조금씩 무뎌지는 시간. ‘신입다움’이 빛나던 자리에 이제는 조금 더 다른 질문이 찾아온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건가?” 그리고 그 질문 옆에는 언제나 이 단어가 함께 선다. 프로. ‘프로다움’이란 무엇일까. 실수 없이 완벽한 것? 언제나 자신 있어 보이는 것? 그런데 미술관 속 화가들은 말한다. 진짜 프로다움은 그것이 아니라고. 두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오랜 시간 자기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의 조용한 자부심이라고. 그 이야기를 건네는 그림 세 점을 소개한다.
(1656)
첫 번째 그림은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걸작 가운데 하나다.
그림 속 장면은 얼핏 왕실의 일상적인 한 장면처럼 보인다.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를 중심으로 시녀들, 난쟁이, 개, 궁정 인물들이 늘어서 있다. 그런데 그림의 왼편을 보면, 거대한 캔버스 앞에 서서 팔레트와 붓을 든 한 사람이 보인다. 화가 자신, 벨라스케스다. 뒤쪽 거울에는 희미하게 왕과 왕비의 모습이 비치고, 그림 밖에 서 있는 우리는 어느새 그 왕과 왕비의 자리에 선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이 그림은 하나의 질문이 된다.
지금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 누가 누구를 보고 있는가. 흥미로운 건 벨라스케스의 차림이다. 그는 작업복이 아니라, 당당한 궁정인의 옷차림으로 캔버스 앞에 서 있다. 스물네 살에 왕실 전속 화가가 된 뒤 평생 펠리페 4세의 가장 신임받는 예술가로 살았던 그는, 이 그림 속에서 화가라는 직업의 품격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보여준다. 화가는 단지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왕을 바라보는 사람이기도 하고, 한 시대의 중심에 서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 이것이 벨라스케스가 오랜 세월 끝에 보여준 프로다움이었다.
프로다움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그 자리에 서 있느냐에서 드러난다. 오래도록 자기 일을 사랑하며 그 자리를 지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조용하고 단단한 자부심. 이 그림 앞에 서면, 결국 당신 자신의 캔버스 앞에 서 있는 뒷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1728)
두 번째 그림은 프랑스 정물화의 대가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의 <가오리>다. 루브르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이 작품에는 꽤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부엌 탁자 위에 배가 갈라진 채 걸려 있는 가오리, 그 아래에서 굴과 식기를 노리며 몸을 웅크린 고양이, 그리고 차가운 식칼과 냄비들이다. 얼핏 보면 이 그림은 불편하고 날것의 냄새가 난다. 그런데 바로 이 그림이 샤르댕의 인생을 바꿨다.
1728년, 거리에서 열린 청년 화가 전람회에 이 작품을 출품했을 때, 현장에서 그림을 본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이 곧바로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샤르댕은 이례적으로 단 하루 만에 심사와 입회를 마치고 아카데미 회원이 됐다.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 제출한 대표작도 바로 이 <가오리>였다.
이 그림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샤르댕은 화려한 신화나 영웅 이야기를 그리지 않았다. 대신 부엌 한편에 있는 아주 평범한 것들을 붙잡아, 그 안에 진짜 삶의 무게를 담아냈다. 가오리의 갈라진 배, 고양이의 팽팽한 긴장감, 식기들의 둔탁하고 차가운 느낌이 하나하나 살아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그가 평범한 것을 오래, 그리고 정밀하게 들여다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프로는 자신이 다루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남들이 지나치는 재료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끝까지 정성껏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일 속에서도 그 안의 가치를 찾아내는 사람이다. 그것이 <가오리>가 말하는 프로다움이다.
(1875)
세 번째 그림은 미국 화가 토머스 에이킨스의 <그로스 클리닉>이다.
2미터가 넘는 큰 화면 위에, 70세의 외과 의사 새뮤얼 그로스 박사가 의과대학 강의실에서 직접 수술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장면이 담겨 있다. 그로스 박사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고, 환자의 허벅지는 절개되어 있으며, 한쪽에서는 누군가 그 장면을 끝내 보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다. 이 그림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철저히 거부당했다. 에이킨스가 미국 건국 100주년을 기념하는 박람회를 위해 공들여 완성한 이 작품은, 심사위원들로부터 너무 끔찍하고 역겹다는 평가를 받으며 미술 전시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그림은 19세기 미국 회화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에이킨스는 왜 이렇게 불편한 장면을 그렸을까. 그는 단지 수술 장면을 기록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로스 박사처럼 오랜 시간 자기 분야를 붙들고, 두렵고 끔찍한 현실도 피하지 않으며, 끝내 자기 일을 해내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로스 박사의 얼굴에는 공포도, 과장된 영웅심도 없다. 오직 오래 쌓인 집중과 경험이 만든 침착함만 있다.
프로다움은 완벽한 모습이 아니다. 불편한 일도 피하지 않고, 남들이 외면하는 현실도 끝까지 마주하며, 자기 일을 흔들림 없이 해내는 것이다. 거부당한 그림이 백오십 년 뒤 걸작이 된 것처럼, 당장 눈에 띄지 않는 성실함도 결국 자기 자리를 만든다. 프로는 이미 완성된 사람이 아니다. 벨라스케스처럼 오래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샤르댕처럼 평범한 것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것, 에이킨스처럼 불편한 진실도 피하지 않는 것. 그 세 가지가 쌓일 때 비로소 우리는 프로다움에 가까워진다.